항목 ID | GC0250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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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 |
영어의미역 | Righteous Arm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집필자 | 정진각 |
[정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한말에 이르기까지 안산 지역에서 국가의 운명이 위급할 때 자발적으로 조직된 순수한 민간 병사들.
[고려시대]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원종의 개경 환도 결정으로 삼별초군이 강화도 점거가 어려워지자 서해안의 도서를 거치면서 진도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는데, 남하하는 도중에 처음 정박했던 지역이 대부도 옆의 영흥도였다. 하지만 여몽연합군은 감히 이를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1271년(원종 12) 강화의 대안 착량을 지키던 몽고병은 대거 대부도로 침입하며 백성들을 침탈하였는데, 이듬해 삼별초군이 북상하여 영흥도를 점령하고 인근을 위협하자, 이때 대부도민은 몽고병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수주(水州)부사 안열(安悅)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안산 지역은 해구(海寇)가 먼저 들어오는 땅이라 하여 초지량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의 구체적인 전투기록은 전하고 있지 않으나 왜군과 전투하였다는 설화와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단원구 와동 지역의 경우 왜병을 혼내주었다는 ‘왜두둘기’, 화정동의 ‘대장골’ 등이 임진왜란 때의 의병활동을 짐작하게 한다.
[한말]
1895년 을미사변이 있은 지 불과 3개월 뒤 음력에서 양력으로 역법(曆法)을 변경하고, 동시에 고종의 조칙으로 단발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유교적 전통을 고수해온 지식인들은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본격적인 활동은 1895년 단발령이 공포된 후 ‘이천수창의소’의 성립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의병진이 조직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김하락(金河洛)·조성학(趙性學)·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인데, 이들은 거의(擧義)에 나서기 이전 모두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이들은 단발령 소식을 듣고 다음날인 12월 31일 이천으로 이동하여 의병 활동에 착수하였다. 김하락 일행은 의병 모집에 나서자 곧 900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이천에서의 의병봉기 소식이 인근에 전해지자 상당한 거리에 있던 안산 지역의 백성은 물론 용인·안성·시흥·수원 등지에서 자발적으로 호응해 이천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천수창의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는데, 이천수창의소는 조직 구성원으로 볼 때 경기도 연합의병진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 무렵 이미 광주 의병장 심진원[심영택], 이천 의병장 박주영, 양근 의병장 이석용은 각각 포군 등 1,6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들은 남한산성이 관군에게 포위되어 위급한 상황에 몰리자, 이천수창의소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천 의병들은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2월 28일 남한산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1896년 3월 22일 남한산성의 갑작스런 함락으로 모든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1896년 2월 개항장이었던 인천을 중심으로 안산·과천·수원 등지에서도 4,000여 명의 항의 시위가 있었다. 이 소식에 접한 일본공사관에서는 안산 지역의 정세를 조사·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에 의하면 안산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안산관아를 습격하고, 관리들의 주택 8채를 공격하여 파괴시키는 등 소란을 일으켰다.”고 되어 있다.
이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순검들이 부상당하였고, 또한 안산군수 안욱상(安昱相)은 이미 도주해버린 뒤였기 때문에 모였던 군중은 안산관아에서 조금 떨어진 산대(山岱)장터[지금의 선부동 서안산인터체인지 근처]에 모여 여러 가지 일들을 논의하다가 24일 인천관찰사에게 여러 가지 일들을 청원할 것을 결의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한다. 이로 보아 산대장터에서 커다란 집회가 이루어졌고 여기에서 많은 의견들이 오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당시 의병은 갑오개혁·을미사변·단발령에 반대하여 있어났고, 따라서 의병 봉기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주자학적 문화 이념 및 갑오개혁·을미개혁에 반대한 복고주의 정치 이념’에 근거한 것이다. 정부는 혼란한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친일내각의 요인들을 ‘역당(逆黨)’ 또는 ‘국적(國賊)’으로 단죄하고 단발령을 철폐하는 한편, 의병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렸다.
이와 더불어 갑오년 이래의 경제파탄과 민생고의 극심함을 고려하여 그 동안 적체된 각종 미수·미납의 공세(貢稅)를 일체 탕감한다는 조처도 취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들은 의병 봉기의 대의명분을 없애버렸으며, 그들을 해산시키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 결과 1896년 3월 이후 의병활동은 점차 쇠퇴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맺어지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1907년에는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 이후 군대마저 해산되자 의병항쟁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경기도 지역에서도 많은 의병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는데, 안산 지역에서는 경기도 서남 해안 지역, 특히 대부도를 중심으로 한 섬 지역에서 지리적인 특수성을 이용하여 이른 바 ‘수적(水賊)’이라 칭하는 의병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 지역이 활동 거점이 된 것은 서울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남부 지방에서 생산된 쌀이 올라오는 길목이었고, 인천항을 통하여 각종 물자들이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기도 해서 비교적 항일투쟁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는 1907년 9월 사강(沙江)에 사는 박선명(朴善明)이 동료 10여 명과 함께 대부도와 화령도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이듬해에는 세력을 더 규합하여 충청도 당진 지역의 도서(島嶼) 지방까지 세력 범위를 넓혔다. 이들은 주로 배를 타고 다니면서 일본 상인의 배를 공격하거나 미곡의 일본 유출을 막으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군 수원수비대에서는 의병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1908년 3월 중순 대부도와 노흥도·풍도 등지를 수색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 이후에도 서해안 섬을 중심으로 한 의병활동이 계속되었다. 1908년 후반에는 일본군이 수뢰정(水雷艇)까지 동원하여 의병활동을 탄압하자 1908년 말에 이르러 활동이 거의 소멸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1907년 10월 12일 수원의 일본 수비대 척후대와 의병 20여 명이 안산에서 두 시간여 동안 격전을 벌였고, 이튿날에는 정시촌에서 다시 교전이 있었는데, 의병활동에 놀란 군수 이석재(李奭宰)는 소요를 피하여 서울로 피신하기에 이르렀다. 또 11월 7일에는 의병 30여 명이 안산군 월입촌 무곡리에 들어와 군수의 소재 여부를 탐문한 뒤 관아로 들어가 군수를 결박한 다음 “우리가 지금 인천항으로 가려고 하는데 군비가 모자라니 안산 관내 부호(富戶)의 성명을 대라.”하였다. 12월 초에는 의병 수십 명이 안산 군내에 들어와 총으로 군수를 위협하고 분파소(分派所)를 부수고 무기를 탈취해갔다. 또한 1909년 4월 하순에는 의병 10여 명이 안산군 인화면 능곡리의 이장집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의병들이 동리 이장집을 공격한 것은 대체적으로 세금 걷는 일을 대신하였던 이장들이 “세금을 정부에 내지 말고 의병에게 내라.”는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의병들이 항일 투쟁활동을 하면서 각 지역에서 일제의 앞잡이 단체인 일진회(一進會) 회원들을 처단하자, 일진회는 자위단을 조직하여 파견하기도 하였다. 1907년 11월 중순 안산에도 윤시병(尹始炳)·원세기(元世基)·이원식(李元植) 등 10여 명이 파견되어 순시하고 돌아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