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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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內浦 |
영어공식명칭 | Naepo, Firth |
이칭/별칭 | 강어귀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지훈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바다가 육지 안으로 들어와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아산호·삽교천·곡교천을 따라 형성된 만.
[개설]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는 내포는 ‘바다나 호수가 육지 안으로 휘어 들어간 부분’으로, 아산호·삽교천·곡교천을 따라 형성된 만(灣)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이후부터는 특정한 지역인 충청남도의 서북부 지역을 의미한다. 내포의 범위를 추측할 수 있는 기록으로는 『고려사(高麗史)』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의 관찬 실록과 『택리지(擇里志)』, 『사연고(四沿考)』, 『대한지지(大韓地誌)』 등의 실학 서적 그리고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 등의 지도 등이 있다.
[내포의 역사]
충청남도 아산시의 내포에 대해 역사적인 측면에서 최초로 언급한 기록은 『고려사』의 공민왕 대이다. 그러나 『고려사』에 언급된 지역이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의 내포와 관련된 기록을 종합해 보면, 내포는 충청도의 서해안 및 가야산 동·서부와 관련이 있으며, 내륙과 바다를 연결하는 포구 주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중기까지 내포에 대한 초기의 기록은 주로 조운(漕運)[배로 물건을 실어 나름]이나 방어와 관련된 내용이다.
18세기 초에는 조운 제도가 크게 변화하게 되면서 조운로의 요충지였던 내포의 중요성이 감소하게 되었다. 조운이 폐지되자 조운과 국방으로 주로 인식되었던 내포의 의미가 터를 고르면 살 만한 곳으로 인식되었다. 신경준의 『사연고』에서 ‘돈곶(頓串)의 서쪽이 내포’라는 구체적인 진술이 있어 이 지역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돈곶은 삽교천과 무한천의 합류 지점 바로 아래쪽에 자리한 포구이다. 현재 아산시 선장면 돈포리와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하평리 일원으로, 삽교천과 무한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내포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가야산 주변의 10개 고을로 정의하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충청남도 예산군, 당진시, 홍성군, 서산시, 태안군 전역과 보령시, 아산시의 일부 지역이 포함된다.
[내포의 생활양식과 문화]
충청남도 아산시의 내포는 대부분 예전에 배가 닿았던 곳이기 때문에 특유의 생활양식을 만들어냈다. 조선 후기에 와서 삽교천 일대는 수운 교통이 편리하며, 주변에 넓은 곡창 지대를 이루고 있어 장삿배들이 왕래하며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처음에 내포는 조운을 주요 기능으로 하였다. 조정에 바치는 물산이 집결하는 운송 거점이었으나 조운선이 정박했던 포구는 하류의 범근 내포(泛斤乃浦)로 옮겼다가, 1478년에는 아산 공세리로 이전하였다. 삽교천 상류에 퇴적이 진행되면서 조운선이 왕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내포의 상업 활동은 활발하였다. 김정호는 내포는 물살이 급하여 밀물 때를 기다려 선박이 왕래하지만, 주변 100여 리[약 40㎞] 벌판에 주민들이 둑을 막아 개간한 까닭에 상선들이 몰려드는 곳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 고지도에는 아산에 속했던 우평면(牛坪面)과 면천의 강문포(江門浦)가 표시되어 있다.
내포 지방은 교역이 활발했던 지역이기 때문에 물자의 유통과 함께 사람들의 교류도 활발했던 곳이었다. 이 지역은 백제가 공주로 도읍을 옮긴 5세기 말 이후에는 중국 문화의 초입지(初入地)로서 새로운 문물을 도입한 선진적인 문화 지역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문화 양식으로는 중국 석굴 조각 양식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도된 마애불 양식이 있어 이 지역이 중국 선진 문물이 수입되는 경로였음을 알게 해준다. 근래는 천주교가 일찍 전래되어 다른 지방으로 전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여 이 지역에는 내포교회가 설립되었다. 1895년에는 충청남도에서 최초로 설립된 아산공세리성당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내포와 지명]
충청남도 아산시 내포 지역은 바다에 접한 곳이 넓게 분포한 까닭에 일찍부터 바다와 관련된 생업 활동이 활발하였다. 지형적 특성으로 연안 어업과 자염 생산이 발하였다. 아산시의 둔포면은 예전에 소금을 활발하게 교역하던 곳에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아산의 옛 지명으로도 예전의 내포 지역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둔포면 신남리의 신흥포, 남창, 민개[冷浦], 신법리의 새개[新浦], 영인면 백석포리의 백석포, 선장면 궁평리의 선장포구(仙掌浦口), 대흥리의 대포(大浦), 돈포리의 돈곶, 포남리의 개롱말, 신덕리의 정포도(井浦渡), 장곳리의 노루지, 장관리, 장곶, 장포, 평창말[平倉-], 채신언리의 개창, 신창면 수장리의 장구포(長久浦), 인주면 공세리의 공세곶, 공세포(貢稅浦), 대음리의 방아개[舂浦, 春浦], 해암리의 해암나루, 걸매리와 밀두리의 나루망, 신창면 신곡리의 여무나루터, 염치읍 송곡리의 송곡나루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