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3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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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溫陽行宮 |
영어공식명칭 | Onyang Temporary Palace |
이칭/별칭 | 온양별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대로 1459[온천동 242-10]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범 |
건립 시기/일시 | 1433년 1월 6일 - 온양행궁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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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597년 - 온양행궁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됨.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662년 - 온양행궁 복구 |
훼철|철거 시기/일시 | 1905년 - 온양행궁 전각 대부분을 온양온천주식회사에서 철거 후 일본식 온천 건물 온양관 건립에 사용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6년 - 온양행궁 자리에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에서 온천장인 신정관 건립 |
현 소재지 | 온양관광호텔 -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대로 1459[온천동 242-10] |
성격 | 행궁 |
[정의]
조선시대 국왕이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 있는 온양온천에 온행을 와 머물기 위해 건립한 별궁.
[개설]
조선시대 최고의 온천욕 장소로 각광을 받았던 곳은 충청도 온양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황해도 평산과 경기도 이천에 왕들이 거둥하기도 했지만, 온양온천의 뛰어난 치료 효능과 지리적 여건은 이곳에 온양행궁(溫陽行宮)을 조성하고 일부 정사를 보게 하는 공간이 되게 하였다.
[위치]
온양행궁은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대로 1459[온천동 242-10] 온양관광호텔 자리에 있었다.
[변천]
조선 태조 때부터 왕실 온천지로 자리 잡은 온양에 처음으로 행궁이 건립된 시점은 세종 때였다. 세종은 1432년(세종 14) 온양행궁 건립을 명하였고, 행궁은 1433년(세종 15) 1월 6일 완성되었다. 이때의 온양행궁은 충청도 청주목 온수현 관아 서쪽 7리[약 2.8㎞] 언한동(言閑洞)에 위치하였고, 크기는 25칸 규모였다. 정청(政廳)과 동·서 2개의 침실(寢室), 남북으로 있는 2개의 탕실(湯室)이 있었다. 북쪽의 탕실은 상탕자(上湯子)로 후대에 북탕(北湯)으로 불리며 왕실 여성들의 목욕 공간이 되었고, 남쪽의 탕실 차탕자(次湯子)는 남탕(南湯)으로 불리며 국왕의 목욕 공간이 되었다. 특히 차탕자는 왕이 온행(溫幸)을 오지 않을 때에는 개방하여 사족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일반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탕(下湯)을 개발하여 삼탕(三湯) 구조를 완비하였다. 온양행궁은 세조 대에 관리인을 두고 관리되며 왕실 온천지로 기능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불에 타 폐허가 되었다.
온양행궁은 현종 대에 다시 세워졌다. 현종은 지병을 다스리기 위해 1662년(현종 3) 온행을 결심하고 온양행궁 복구를 명하였다. 이때의 온양행궁은 어실(御室)과 탕실, 각종 부속건물로 약 100여 칸 규모였다. 행궁 주위는 포장(布帳)으로 둘러 대신과 시위군이 머물 공간을 확보하였다. 포장의 둘레는 500보[약 600m]였다. 이후 온양행궁은 수차례 증축과 개축을 겪었다. 1795년(정조 19) 발간된 『온궁사실(溫宮事實)』의 「온양별궁전도(溫陽別宮全圖)」에는 온양행궁의 내전과 외전이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개인적 공간인 내정전(內政殿)과 공식적 공간인 외정전(外政殿)이 있고, 왕자방(王子房)과 종친부(宗親府), 궐내각사(闕內各司)들을 확인할 수 있어 궁궐의 형태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온양행궁은 온천수가 나오는 탕정(湯井)의 좌우에 욕실 2개가 있어 온천욕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온양행궁은 현종 이후 왕과 왕실의 구성원이 간혹 찾으면서 관리가 잘 되었지만, 순조 이후 왕실의 온행이 중단되면서 쇠락하게 되었다. 이후 쇠락한 온궁을 흥선대원군이 개조하여 별장으로 활용하면서 사유화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관리직원을 배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으나, 1904년 예종석(芮宗錫)과 결탁한 일본인들이 점유하고 온천을 관광지로 개발하였다. 아미토 도쿠야[網戶得哉]를 비롯한 일본인들은 1900년대 초 온양온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온천을 개발하였다. 이때 온양행궁에 남아 있던 전각들은 몇 개를 남기고 철거되어 온양관(溫陽館)이라는 일본식 목욕탕 건물의 건축자재로 활용되었다. 이후 온양온천은 1926년 사설 철도회사인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가 인수하여 유원지로 개발되었다.
[형태]
온행은 다른 행행(行幸)과는 달리 국왕이 외지에 머무는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일정 규모를 갖춘 행궁이 필요하였다. 온천 지역에 있는 온궁은 국왕과 가족의 생활공간인 침전(寢殿), 관료들과 국정을 운영하는 정전(政殿), 목욕 공간인 탕실이 필요하였다.
[현황]
광복 이후 온양온천의 소유권은 대한민국 정부로 넘어갔다. 이때 온양행궁 자리에 있던 호텔을 교통부 육운국(陸運局)이 관리하면서 온양철도호텔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 발발한 6·25전쟁으로 호텔이 파괴되어 1956년 양식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이후 소유권이 국제관광공사를 거쳐 민간에 이양되면서 오늘날의 온양관광호텔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