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6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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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修堂李南珪先生殉節碑 |
영어공식명칭 | Stone Monument for Sudang Lee Namgyu seonsaeng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홍승균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2년 - 이남규 건국공로훈장단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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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986년 12월 15일 - 수당 이남규선생 순절비 건립 |
현 소재지 | 수당 이남규선생 순절비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595-136 |
성격 | 비 |
관련 인물 | 이남규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있는 애국지사 이남규의 순절지에 세운 비.
[개설]
수당 이남규선생 순절비(修堂李南珪先生殉節碑)는 1906년(고종 43) 병오의병(丙午義兵) 당시 홍주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이 패퇴하였을 때 민종식의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가 체포된 뒤 공주 감옥에 투옥되어 고초를 겪는 등 일제에 맞서다가 순절한 이남규를 기리기 위해 1986년 충청남도지사에 의해 세워진 비이다.
이남규(李南珪)[1855~1907]의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원팔(元八), 호는 수당(修堂)이다. 서울 태생이지만 향리는 예산이다. 1875년(고종 12)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형조참의, 안동부관찰사, 영흥부사 등을 역임하다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관직을 박차고 왜적을 물리칠 것과 척신(戚臣)의 머리를 베라는 상소를 올려 당대의 추앙을 받았다.
1906년 홍주의진(洪州義陣) 선봉장에 임명됐으나 홍주성에 입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홍주의진이 크게 패하자 홍주 탈환 작전 본부를 구성하고 거사 준비도 갖췄다. 홍주 탈환 작전을 계획하였던 것이 누설되어 100명이 넘는 일본 기마병이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이남규 사저의 사랑채 평원정(平遠亭)을 에워싸고 묶어 압송하려 하였다. 이에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된 일은 당하지 않으리라."라고 외치며 가마를 타고 나섰다. 서울로 압송되던 중에 지금의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의 냇가에 이르렀다. 날이 어두워질 즈음 일본군이 통역관을 통해 일본의 고위 관직을 제시하며 회유를 하였다. 이남규가 이를 단호히 거부하자 일본군은 칼을 내리쳐 순국하였다. 이때 함께 뒤따르던 맏아들 이충구(李忠求)는 몸으로 막아서다가 먼저 칼을 맞고 순국하였으며, 가마꾼 김응길(金應吉)과 하인 가수복(賈壽福)까지 일본군의 칼에 쓰러졌다.
[건립 경위]
일제의 만행이 영영 묻힐 뻔하였으나 지금의 아산시 송악면 역촌리에 사는 유진원(兪鎭元)이라는 사람이 이를 발견하여 시신을 지켰고, 자그마치 열두 군데나 자상을 입은 가수복이 기적적으로 생환함에 따라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고 이남규의 유해도 수습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단장[지금의 건국공로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86년 12월 15일 순절지에 수당 이남규선생 순절비를 세웠다.
[위치]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595-136에 수당 이남규선생 순절비가 있다.
[형태]
수당 이남규선생 순절비는 방형의 비대석(碑臺石) 위에 자연석으로 비신(碑身)을 세웠다. 기념비 비문은 당시 아산군수 이호종의 건의로 충청남도지사 안응모가 작성하고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한국예총] 충청남도 지회장 조중욱이 썼다. 옆에는 안내석을 설치하였고 주변은 조경을 하여 정성스레 단장하였다.
[금석문]
‘수당 이남규선생 순절의 땅’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의의와 평가]
이남규가 순절한 지역은 생전에 인연이 없었던 지역이지만, 송악면 주민에 의해 발견되고 참혹한 현장의 당시 상황이 전래되어 대단히 의미로운 장소이다. 따라서 수당 이남규선생 순절비는 애국선열의 의연한 기상과 일제의 만행을 상기시키는 유서 깊은 상징 기념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