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6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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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世龜 |
영어공식명칭 | Gang Segu |
이칭/별칭 | 중보(重寶),삼휴당(三休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동화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경윤 |
출생 시기/일시 | 1632년 - 강세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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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76년 - 강세구 강릉참봉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78년 - 강세구 증광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 정언, 수찬 등을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89년 - 강세구 호조참의를 거쳐 충청도관찰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92년 - 강세구 예조참의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93년 - 강세구 대사간이 되어 왕의 유행을 간하다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698년 - 강세구 공조참판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01년 - 강세구 장희빈 사사 반대로 영안도 홍원에 유배 |
몰년 시기/일시 | 1701년 - 강세구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707년 - 강세구 용호서원에 추향 |
묘소|단소 | 강세구 묘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동화리 분토골 |
사당|배향지 | 용호서원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용호동 39번지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진주 |
대표 관직|경력 | 대사간|공조참판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온양 출신으로 용호서원에 추향되었던 문신.
[개설]
강세구(姜世龜)[1632~1701]는 1678년(숙종 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으며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정언(正言), 수찬(修撰), 호조참의, 충청도관찰사, 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회덕[현재 대전광역시 대덕구]의 용호서원(龍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진주강씨(晉州姜氏)는 대대로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동화리 주변에 터를 잡고 살아온 성씨로 강세구를 비롯하여 선대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북청판관(北靑判官)를 지낸 강자위(姜自渭)를 송악면 동화리 지역의 입향조로 삼고 있으며, 강세구는 강자위의 7세손이다. 1675년(숙종 원년)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할 때에 거주지가 온양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산 지역에 세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가계]
강세구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중보(重寶), 호는 삼휴당(三休堂),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대사헌 강첨(姜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학년(姜鶴年),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강호(姜鎬), 어머니는 윤지경(尹知敬)의 딸이다. 진주강씨는 아산시 송악면 일대에 터를 잡고 살다가 강문한(姜文翰) 대에 현재 대전광역시 대덕구 석봉동 일대로 이거하게 되었다.
강세구의 고조할아버지인 강운상(姜雲祥)으로부터 증조할아버지 강첨, 강첨과 형제인 강주(姜籒), 할아버지 강학년, 강학년의 사촌인 강백년(姜栢年)으로 이어지는 진주강씨의 가계는 학문 사상은 물론 중앙 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특히 강운상, 강첨, 강학년으로 이어지는 복천공(復泉公)의 가계는 강호, 강세구로 이어져 복천공파를 형성하였으며 1697년(숙종 23) 강학년·강세구 등을 배향한 용호사(龍湖祠)의 건립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사족 가문의 성장 사례를 보이고 있다.
[활동 사항]
강세구는 1660년(현종 1) 진사(進士)가 되었고, 1676년(숙종 2) 강릉참봉에 기용되었다. 1678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정언·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 5) 교리(校理)로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급제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1689년(숙종 15) 호조참의를 거쳐 충청도관찰사에 기용되었으며 1692년(숙종 18) 예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693년(숙종 19) 대사간이 되어 이듬해 왕의 유행(遊幸)[임금이 대궐 밖으로 거둥함]을 간하다가 파직되었다. 1698년(숙종 24)에는 공조참판이 되었다. 1701년(숙종 27) 장희빈(張禧嬪)을 사사하려 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영안도(永安道) 홍원(洪原)[현재 함경남도 홍원군]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묘소]
강세구의 묘는 아산시 송악면 동화리 분토골에 있다. 분토골에는 아버지 강호를 비롯하여 선대의 묘가 함께 자리 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강세구는 사후 복관되었으며, 회덕의 용호서원에 할아버지 강학년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용호서원의 건립은 다른 서원·사우(祠宇)들과 달리 관의 도움을 철저히 배제한 가운데 관계 유림들의 힘만으로 이루어낸 특이한 사례로 주목된다. 강세구는 1707년(숙종 33)에 추향(追享)되었다. 용호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대전광역시 대덕구 용호동 39번지에 터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