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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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孟胄瑞 |
영어공식명칭 | Maeng Juseo |
이칭/별칭 | 휴징(休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명진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문신.
[개설]
맹주서(孟胄瑞)[1622~1679]는 현종과 숙종 대에 활약했던 문신으로, 1678년(숙종 4) 안동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푼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특진관(特進官)에 이르렀다.
[가계]
맹주서의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휴징(休徵)이다. 할아버지는 맹희(孟喜)이고, 아버지는 맹세형(孟世衡)이며, 어머니는 최준(崔濬)의 딸이다. 아들은 맹만택(孟萬澤)이다.
[활동 사항]
맹주서는 1654년(효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1666년(현종 7)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를 다녀왔다. 이때 사행(使行)은 허적(許積)이 사은 겸 진주변무사(謝恩兼陳奏辨誣使), 남용익(南龍翼)이 부사(副使), 맹주서가 서장관이었다. 1670년(현종 11) 황해도관찰사, 공조참의, 부승지(副承旨)를 거쳐 1672년(현종 13) 승지, 예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듬해에 우승지, 병조참의, 호조참의,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맹주서에 관한 마지막 기록은 『숙종실록』 8권, 숙종 5년(1679) 3월 25일 경신(庚申)에 "특진관 맹주서도 시골에서 직접 목도한 사실을 아뢰니"라고 쓰여 있다. 따라서 맹주서는 온양에서 이 직후에 사망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맹주서의 아들 맹만택(孟萬澤)은 현종의 맏딸인 명선공주(明善公主)와 혼인하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공주가 혼인하기 전에 사망하자 혼인은 무산되었다. 맹주서의 아들이 현종의 부마가 되려고 했으므로 이를 통해 현종의 맹주서 가문에 대한 신뢰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묘소]
맹주서의 묘소는 충청남도 연기군 서면 고복리[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고복리]에 있으며, 묘표(墓表)와 묘갈(墓碣)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