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9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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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臣李莞旌閭 |
영어공식명칭 | Chungsin Lee wan Jeongnyeo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여송은 |
건립 시기/일시 | 1704년 - 충신 이완 명정이 내려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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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충신 이완 정려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산57-1 |
성격 | 정려 |
양식 | 익공식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5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아산 이충무공 유허 경내에 있는 충신 이완의 조선 후기 정려.
[개설]
이완(李莞)[1579~1627]의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열보(悅甫), 시호(諡號)는 강민공(剛愍公)이다. 아버지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백형인 이희신(李羲臣)이고 어머니는 진주강씨이며 4남으로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숙부 이순신 지휘 아래 종군하였고, 1598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1599년(선조 32) 무과에 급제해 1618년(광해군 10) 평양중군이 되었으며, 1623년(인조 원년)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1624년 호현에서 이천으로 도망치는 이괄(李适)의 난군을 평정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1624년(인조 2) 의주부윤이 되었는데 1625년에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군사들이 마을에서 행패를 부리자 부장 한 명을 곤장으로 때려서 문제가 되어 자급(資級)이 한 등급 깎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뒤의 청]의 군사들이 의주를 침범했을 때 맞서 싸우다 부상을 당하고 승산이 없게 되자 "군기는 적에게 내줄 수 없다."라고 하면서 군기고에 불을 지르고 사촌동생 이신(李藎)과 함께 불에 뛰어들어 분사(焚死)하였다. 사후 1704년(숙종 30)에 충신 명정이 내려지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26년(영조 2)에 아산의 현충사에 추가 배향되었다.
[위치]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사적 제155호 아산 이충무공 유허 경내에 있다. 입구를 거쳐 충무문을 지나면 70여m 앞 오른쪽에 충신 이완 정려가 있다.
[변천]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에는 이완의 정려문과 묘소가 있으며 용인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애초 충신 이완 정려는 용인에 내려졌고 이완이 현충사에 추배되면서 현충사에도 정려 현판을 걸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 시기와 과정은 파악되지 않는다.
[형태]
정려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익공식 맞배지붕 건물이다. 팔각 장주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올렸으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기와는 청기와를 사용하였다. 벽면은 모두 홍살을 설치했으며 좌우 측면에 방풍판을 시설하였다. 충신 이완 정려 현판은 정려각을 바라보면서 왼쪽에서 두 번째 칸에 걸려 있고 바탕은 검은색, 글씨는 흰색이다.
명정 현판에는 ‘충신 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행가선대부의주부윤의주진병마첨절제사 시강민공이완지려-숙종갑신월일명정(忠臣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行嘉善大夫義州府尹義州鎭兵馬僉節制使諡剛愍公李莞之閭-肅宗甲申月日命旌)’이라고 쓰여 있다.
[의의와 평가]
충신 이완 정려는 아산 이충무공 유허 경내의 정려에 숙부인 충무공 이순신의 충신 정려, 그리고 이홍무·이봉상·이제빈 등 집안 후손들의 충신, 효자 정려와 함께 나란히 걸려 있어 강민공 이완 및 그 집안의 충효 정신을 잘 보여 주는 뜻깊은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