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9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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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李悌彬旌閭 |
영어공식명칭 | Monument for Filial Son Lee Je-bin(Hyoja Lee Je-bin Jeongnyeo)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산57-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여송은 |
건립 시기/일시 | 1840년 - 효자 이제빈 명정이 내려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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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효자 이제빈 정려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산57-1 |
성격 | 정려 |
양식 | 익공식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5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아산 이충무공 유허 경내에 있는 효자 이제빈의 조선 후기 정려.
[개설]
이제빈(李悌彬)[1772~1837]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본인(本仁)이며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8대손이다. 5세에 문사(文詞)를 지을 줄 알았으며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집안이 가난해지자 일찍부터 무과를 준비하여 1801년(순조 1) 30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고 1835년(헌종 1)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이르렀다. 고을 수령을 세 차례 역임했는데 세 고을에서 모두 선정비를 세워 이제빈의 덕을 칭송하였다.
일찍부터 효자였던 이제빈은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해졌을 때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시게 해서 어머니가 반나절을 더 연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모친상을 당하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모신 뒤 매일 찾아가 곡을 하며 슬퍼하였다. 또한 나무꾼이 와서 "효자가 다녀서 길이 났다."라고 할 만큼 지극정성으로 묘를 살폈다. 그러한 효행이 알려져서 사후 얼마 안 된 1840년(헌종 6)에 효자 명정을 받게 되었다.
[위치]
효자 이제빈 정려는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사적 제155호 아산 이충무공 유허 경내에 있다. 정려에는 선조들인 이순신, 이완, 이홍무, 이봉상 등 4충신의 정려도 함께 있다.
[변천]
효자 이제빈 정려의 초기 건립 과정과 형태, 이후의 변천 과정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형태]
정려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익공식 맞배지붕 건물이다. 벽면은 사방 모두 홍살이 설치되어 있고 처마는 겹처마이며, 기와는 청기와를 사용하였다. 좌우 측면에 방풍판을 시설하였다. 효자 이제빈의 명정 현판은 정려각 정면 5칸 중 바라보면 맨 오른쪽 칸에 걸려 있으며 바탕은 검은색, 글씨는 흰색이다. 내용은 ‘효자 절충장군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이제빈지려 경자오월일 명정(孝子折衝將軍慶尙左道水軍節度使李悌彬之閭 庚子五月日命旌)’이라 쓰여 있다.
[의의와 평가]
현충사 정려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그의 후손 4명, 이른바 4충신(忠臣) 1효자(孝子)가 받은 5개의 정려가 함께 나란히 걸려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자료이다. 그중 이순신의 8대손인 이제빈의 정려는 가장 후대의 정려이자 효자로 받은 정려라는 데 특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