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5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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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淸水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문광균 |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에 있는 조선 시대 충청도의 해양 방어를 총괄하였던 성곽.
[개설]
조선 시대 정3품의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가 주재하는 수영(水營)으로 성곽은 1510년(중종 5)에 석성으로 쌓았다. 이후 충청도 해역에 대한 방비, 조운선 호송 등을 담당하다가 1895년(고종 32) 폐영(閉營)되었다.
[관련 기록]
현전하는 충청수영 관련 기록물은 주로 19세기의 것이 대부분이다. 그중 장계등록(狀啓謄錄)으로 규장각에 『충청수영계록(忠淸水營啓錄)』과 『충청수영관첩(忠淸水營關帖)』이 전하고 있으며, 일본 도쿄 도요문고[東洋文庫]에 소장된 『소영경력』이 남아 있다. 이 외 고문서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충청수영소관송전성책」, 「충청수영소재각양선척급개조주수구별수효성책」 등 송정(松政)[소나무를 심고 가꾸는 데 관한 정책이나 행정]과 주사(舟師)[수군(水軍)을 달리 이르는 말]에 관한 기록물이 다수 전한다. 또한, 일종의 실무 지침서나 운영 규정으로 볼 수 있는 『충청수영사례집』도 전하고 있다.
[내용]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에 언제부터 수군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수군도안무처치사는 보령현 서쪽 대회이포(帶回伊浦)에 머무른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충청도 지역의 나머지 수군진에는 만호(萬戶)가 머무른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15세기부터 보령 지역이 조선 전기부터 충청도 해안의 방어 중심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1510년(중종 5)에 둘레 3,174척, 높이 11척의 석성으로 쌓았다. 17세기 이후로는 왜적의 침입보다 서양의 선박인 이양선(異樣船)의 출몰 등 서해안 방비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수영 이설, 행영 설치에 관한 논의가 있었으나 충청수영이 갖는 지리적 중요성으로 본영이 옮기지는 않았다. 그렇게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해방(海防), 조운선의 호송, 송전(松田) 관리, 각종 대민 업무 등을 지속하였다.
[변천]
충청수영의 폐지는 을미개혁(乙未改革)의 일환으로 발표된 1895년(고종 32) 7월 15일 칙령 제140호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의 폐지에 관한 안건」에 따라 결정되었다. 폐영 후에는 한말 세도가로 알려진 양주 조씨 가문의 사패지(賜牌地)가 되어 선산(先山)으로 조성되었다. 이후 2009년에 사적 501호로 지정되었다.
[관련 문화재]
영사(營舍)의 경우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의 읍지류와 「보령부지도」 등의 고지도에서 많은 건물을 확인할 수 있으나, 현재는 진휼청, 장교청[객사], 내삼문만 남아 있다. 성문은 4개 문이 모두 없어지고 서쪽 망화문(望華門) 터의 아치형 석문(石門)만이 남아 있다. 조선 시대 많은 묵객들이 시문을 남긴 영보정(永保亭)이 있었는데 187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2015년 복원되었다. 이 외 충청수영 내에 있던 계금(季金) 장군 청덕비가 오천초등학교 뒤편에 남아 있으며, 삼문 앞에는 역대 수사 및 관련 인물들의 선정비가 있다.
[의의와 평가]
충청수영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전하는 자료를 통해 수군의 편제와 조직, 업무 범위 등의 제도를 이해할 수 있는 등 역사적 자료로 중요하다. 또한, 유식(遊息) 공간이었던 영보정을 소재로 박은(朴誾)[1479~1504], 이안눌(李安訥)[1571~1637], 정약용(丁若鏞)[1762~1836] 등 당대 명사들의 시문이 전하고 있어 경관, 예술적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