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478
한자 李山甫
이칭/별칭 중거(仲擧),명곡(鳴谷),충간(忠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39년연표보기 - 이산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67년 - 이산보 사마시 입격
활동 시기/일시 1568년 - 이산보 증광 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77년 - 이산보 동인의 탄핵으로 종부시정 좌천
활동 시기/일시 1578년 - 이산보 대사헌으로 특진
활동 시기/일시 1585년 - 이산보 집의로 전임, 이어 동부승지·대사간·우승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89년 - 이산보 기축옥사 때 대사간으로 난국 수습
활동 시기/일시 1590년 - 이산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대사헌 복직
활동 시기/일시 1591년 - 이산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파직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이산보 임진왜란 때 선조 호종
몰년 시기/일시 1594년연표보기 - 이산보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04년 - 이산보 호성공신 2등 책록, 영의정 추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4년 - 이산보 유허비 건립
부임|활동지 부임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묘소|단소 이산보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화암서원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죽성로 411[장산리 산27-1]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건암서원 - 충청남도 서천군 문산면 지원리
사당|배향지 유허비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한산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충청남도 보령과 서천의 서원에 향사된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이산보(李山甫)[1539~1594]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1517~1578]의 조카이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를 호종(扈從)하고 전후에는 기근을 해결하고자 힘썼다.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거(仲擧), 호는 명곡(鳴谷)이다. 고려 말 성리학자인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의 7대손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장윤(李長潤)이다. 할아버지는 이치(李穉)[1477~1507], 아버지는 이지무(李之茂), 어머니는 능성 구씨(綾城具氏)이다. 작은아버지는 토정 이지함이며, 사촌은 이산해(李山海)[1539~1609]이다.

[활동 사항]

명곡 이산보는 1567년(명종 22) 사마시를 거쳐, 1568년(선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때 생원과 문과방목(文科榜目)에 거주지가 충청남도 보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승문원의 추천으로 춘추관에 들어간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77년 양모 조씨가 사망한 후 서천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현재의 문산면 지원리 명곡마을이다.

이산보는 시묘살이를 하면서 명곡정사(鳴谷精舍)를 짓고 강학하였는데, 이 사실이 널리 알려져 창건 후 3년가량 지난 1580년 4월에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이 찾아와 강학하였으며, 1581년에는 목활자본 『표제구해공자가어(標題句解孔子家語)』와 『신간소왕사기(新刊素王事記)』가 간행되었다. 이것은 당시 지방에서는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었다.

조헌의 문집인 『중봉집(重峯集)』에는 토정 이지함의 장례에 참석하러 왔다가 명곡서당에 머물러 수개월 강학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586년에 공주 제독관이 된 조헌은 상소를 올려 서천의 명곡정사에 영특한 자들이 많아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1534~1599]을 산장(山長)[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산중에 묻혀 사는, 학식과 도덕이 높은 선비]으로 삼기를 청하였다. 명곡정사에서 배운 이들 중에는 보령 청라동의 사족(士族) 김해수(金海壽)도 있다.

이산보는 작은아버지 토정 이지함에게 수학하고, 그 문하에서 송익필, 조헌, 서기(徐起)[1523~1591] 등과 교류하였다. 정계에서 활동할 때인 1577년 동인들의 탄핵을 받고 종부시정에 좌천되었고, 1585년에 부제학 김우옹(金宇顒)[1540~1603]이 이이(李珥)[1536~1584]·정철(鄭澈)[1536~1593]을 논박(論駁)하자, 이에 반박해 선조의 신뢰를 얻어 대사헌으로 특진되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대사간으로서 수습하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1591년(선조 24) 왕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동서분당 사이에서 일어난 정치적인 사건]로 서인이 화를 당할 때에 파직되어 고향인 보령에서 우거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재위: 1567~1608]를 호종하였고,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1549~1598]을 설득해 조선으로 들어오게 하였으며, 도검찰사(都檢察使)로 북도와 삼남을 두루 다니며 군량을 조달하였다. 1594년 대기근에 밤낮없이 구휼에 힘쓰던 중 병을 얻어 홍양 객사[홍주관아]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숙부 이지함의 영향으로 『역학계몽(易學啓蒙)』에 조예가 깊었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산보가 남긴 명곡정사의 강학의 전통은 사후 70년이 지난 1650년에 서천의 명곡서원으로 창건되어 1713년 건암서원(建巖書院)으로 사액되었다. 또한, 보령에는 청라서원(靑蘿書院)으로 창건된 서원에 이지함이산보를 향사하다 1686년에 화암서원(花巖書院)으로 사액되었다. 이산보를 제향하는 불천지위 사당이 보령에 세워졌는데, 종손이 예산으로 이거하면서 옮겨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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