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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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山 李氏 |
이칭/별칭 | 한산 이씨 아계파,한산 이씨 명곡파,한산 이씨 토정파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문광균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477년 - 이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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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 시기/일시 | 16세기 초{추정] - 이치 입향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530년 - 이치 사망 |
본관 | 한산 - 충청남도 서천군 |
성씨 시조 | 이윤경(李允卿) |
입향 시조 | 이치(李穉) |
[정의]
이치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보령 지역의 이거 성씨.
[개설]
한산 이씨(韓山 李氏)는 이윤경(李允卿)[?~?]을 시조로 하고 이곡(李穀)[1298~1351]을 중시조로 하며, 이치(李穉)[1477~1530]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보령 지역의 이거 성씨이다.
[연원]
한산 이씨의 시조는 고려 시대 호장(戶長)을 지낸 이윤경이다. 고려 시대에 이름이 높았던 한산군(韓山君) 이곡을 중시조로 하는데, 이곡을 통해서 성리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곡의 아들 이색(李穡)[1328~1396]은 유종(儒宗)[유학의 선비들이 우러러보는 큰 학자]으로 추앙되는 존재이다. 한산 이씨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시대까지 고위직을 배출한 명문가로 다수의 문과급제뿐만 아니라 명망 있는 신하들을 많이 배출한 가문이었다. 이후 이곡의 6세인 이치가 충청남도 보령으로 입향하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입향 경위]
점차 가문의 쇠약으로 이치와 이치의 아버지 이장윤은 관직이 현령과 현감에 머물게 되었다. 이치의 작은아버지인 이파(李坡)가 성종 대 폐비 사건에 연루되어 진도로 유배되는 등 어려운 상황에서 이치는 자신의 처가였던 충청남도 보령으로 내려와서 살게 되었다.
이치의 아내는 광산 김씨인 집현전 학사 김맹권(金孟權)[?~?]의 딸이었는데, 이치가 보령으로 온 까닭은 처가가 보령의 영향력 있는 사족인 광산 김씨였기 때문이었다. 이치가 보령으로 온 이후에 아들 3형제 이지번(李之蕃)[1508~1575], 이지무(李之茂)[?~?], 이지함(李之菡)[1517~1578]이 모두 현달(顯達)[벼슬, 명성, 덕망이 높아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남]하였다. 손자인 이산해(李山海)[1539~1609], 이산보(李山甫)[1539~1594], 종손 이경전(李慶全)[1567~1644] 등도 관직이 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역량도 매우 높았기 때문에 가문의 위상이 회복되어 전국적인 명문 거족이 되었다.
이후 이산해의 아계파, 이산보의 명곡파, 이지함의 토정파가 세거해 오고 있다. 현재 아계파는 인근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이거하였고, 명곡파의 경우도 일부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이거하였다.
[현황]
2015년 본관 인구 분포 조사에 따르면, 충청남도 보령시에 거주하는 한산 이씨는 1,225명으로 파악된다.
[관련 유적]
화암서원(花巖書院)은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에 있는 이지함과 이산보를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서원이다. 1610년(광해군 2) 창건 통문으로 건립이 추진된 이후 14년이 지난 1624년(인조 2)에 온전한 서원의 위상을 마련하고, 이지함과 이산보를 배향하였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이몽규(李夢奎)[1510~1563], 이정암(李廷馣)[1541~1600], 구계우(具繼禹)[1558~1620]를 추배하여 모두 5개의 위를 제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