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553 |
---|---|
한자 | 三別抄 孤瀾島 攻擊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강종원 |
[정의]
고려 시대 삼별초가 여원연합군과 항쟁하는 과정에서 충청도 보령 지역에 있는 고란도를 공격한 사건.
[개설]
삼별초(三別抄)는 1270년 6월 개경으로의 환도를 거부하고 진도와 탐라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여원연합군과 3년간의 항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삼별초가 1272년 9월 고란도(孤蘭島)에 침입하여 전함 6척을 불태우고 배를 만드는 장인을 죽였으며, 조선관(造船官)이었던 홍주부사 이행검(李行儉)과 결성감무(結城監務)와 남포감무(藍浦監務)를 잡아갔다.
[역사적 배경]
삼별초는 처음에는 도적을 잡고 폭행을 금지할 목적으로 무인정권(武人政權)기에 설치되었다. 이후 도성의 수비와 친위대로서의 임무도 수행하였으며, 외적과 싸우는 군사 활동도 전개하였다. 특히 몽골 침략 시 몽골군과의 전쟁을 주로 담당하였다.
[경과]
고려 원종(元宗)[재위: 1259~1274] 때 몽골과의 강화에 따라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였는데, 삼별초는 이에 불복하고 대몽항쟁(對蒙抗爭)을 이어갔다.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군 왕온(王溫)을 국왕으로 받들어 새 정부를 수립하고, 본거지를 진도로 옮겨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그러나 1년여 만에 김방경(金方慶)[1212~1300]이 이끄는 여원연합군에게 진도가 함락되었고, 남은 무리는 다시 탐라도로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다.
김통정(金通精)[?~1273]은 탐라도로 이동한 이후 약 반년 동안 전함을 건조하고 탐라성을 수축(修築)하여 군사력을 재건하였다. 전열을 재정비한 삼별초군은 1271년(원종 12) 말부터 남해 연안 일대에서 중앙 정부의 전함과 세미(稅米) 운송 선박 등을 기습 공격하여 고려의 해상 활동 기능을 마비시켰다.
1272년 6월에 삼별초군은 서해 연안을 따라 북상을 계속하여 서산 앞바다를 거쳐 강화만(江華灣)의 영흥도(靈興島)까지 진출하였다. 그 후 8월에는 전라도로부터 개경으로 가는 세곡 운송을 공격하여 세미 800석을 탈취하였다.
또한, 9월에는 고란도를 공략하여 전함 6척을 불태웠으며, 배를 만드는 장인을 죽이고 조선관이었던 홍주부사 이행검을 비롯해 결성감무와 남포감무를 잡아갔다. 삼별초가 공격한 고란[고만]이라는 지명은 현재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에 남아 있고, 송학리에는 고란도[고만도]로 추정되는 솔섬이 있다. 그런데 고란도를 원산도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어서 11월에 경상도 합포에 진출하여 전함 20척을 소각하고 다시 거제도 부근으로 나아가 전선 3척을 소각하는 등의 활약을 전개하여 고려 관군과 원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결과]
삼별초군의 3년에 걸친 항쟁은 결국 1273년(원종 14년)에 평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삼별초의 고란도 공격은 고려를 예속화하려던 몽골의 정책과, 조국의 예속화와 종속적 위치를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보호하려던 국왕 및 그 일파의 행동에 반발하여 병사들이 항거한 항쟁이었다. 또한, 이들 병사들의 항몽 정신은 고려 무인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며, 고려가 독립 국가로서의 위치를 유지하는 데 상당 부분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