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719
한자 漢陽 趙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문광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미상 - 조필 출생
입향 시기/일시 16세기 초[추정] - 조필 입향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미상 - 조필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01년대 - 한양 조씨 보령시 동대동 원산 이주
본관 한양 - 서울
입향지 한양 조씨 입향지 - 충청남도 보령군 청라면 옥계리
세거|집성지 한양 조씨 세거지 - 충청남도 보령시 동대동 지도보기|화산동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영모재 - 충청남도 보령시 화산동 굴고개
성씨 시조 조지수(趙之壽)
입향 시조 조필(趙弼)

[정의]

조필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보령 지역의 이거 성씨.

[개설]

한양 조씨(漢陽 趙氏)는 조지수(趙之壽)[?~?]를 시조로 하고 조필(趙弼)[?~?]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보령 지역의 이거 성씨이다.

[연원]

한양 조씨는 한양[현재 서울특별시]을 본관으로 하고, 고려 시대 중서사(中書事) 조지수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이후 조필이 충청남도 보령으로 입향하였다.

조지수의 증손인 조돈(趙暾)[1308~1380]은 용성총관을 지내고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공(功)을 세워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현손(玄孫) 조인벽(趙仁壁)[1328~1393]은 아우 조인옥(趙仁沃)[1347~1396]과 함께 조선 개국에 많은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었으며 태조 이성계의 매부가 되었다. 조인벽의 아들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1347~1417]은 찬성사를 지냈고 조위(趙渭)는 우의정을 지냈다. 이후 후손들이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걸출한 인물을 다수 배출하여 한양의 대표적인 가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입향 경위]

1519년(중종 14)에 한양 조씨인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삭탈관직(削奪官職)[죄를 지은 자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이름을 지우던 일] 유배(流配)를 당하고 이후에 사사(賜死)[죽일 죄인을 대우하여 임금이 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던 일] 당하면서 가문이 멸문의 화를 입었다. 당시 조광조의 친족이던 조필이 양주(楊州)로 피신하였다가 둘째 아들 조희웅(趙希雄)을 데리고 변장하여 충청도의 오서산(烏棲山)[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옥계리]에 이르러 정착하여 숨어서 살게 하고 본인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화를 입었다.

조필은 “이곳은 자손의 영구 보존하는 지역으로 삼고 오직 청빈(淸貧)한 사람으로 살아가라”라는 교훈을 남기면서 한양 조씨 가문의 가훈이 되었다. 조희웅의 손자인 조석천(趙石川), 조원방(趙元方)이 보령시 동대동 원산에 이주한 것이 보령시 거주의 효시이고, 증손 조성호(趙聖豪), 조명호(趙命豪) 형제가 보령시 명천동 명암에 이거하였다.

[현황]

2015년 통계지리정보서비스 본관 인구 분포 조사에 따르면, 충청남도 보령시에 거주하는 한양 조씨는 1,245명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관련 유적]

한양 조씨의 사우(祠宇) 영모재(永慕齋)가 충청남도 보령시 화산동 굴고개에 자리하고 있다. 영모재 앞에 묘촌(墓村)을 기리는 비석에는 화산동 정착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보령시지』(보령시지편찬위원회, 2010)
  • 통계지리정보서비스(https://sgis.kostat.go.kr)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