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12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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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京日記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사현 |
저술 시기/일시 | 1906년 - 『홍경일기』 저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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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일기 |
저자 | 윤석봉 |
권책 | 1책 |
행자 | 10행 자수부정 |
규격 | 28.0㎝[세로]|18.0㎝[가로] |
어미 | 상하향이엽화문어미(上下向二葉花紋魚尾) |
[정의]
개항기 충청남도 보령시 일대에서 활약하였던 한말 의병장 윤석봉이 쓴 일기.
[개설]
『홍경일기(洪京日記)』는 1906년 윤석봉(尹錫鳳)[1842~1910]이 홍주의병(洪州義兵)에 참여한 음력 4월 22일부터 6월 7일까지 약 2개월간의 일을 기록한 일기이다.
[저자]
윤석봉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운서(雲瑞), 호는 희당(希堂) 또는 삼희당(三希堂)이다. 경기도 양주군[지금의 양주시] 장흥면에서 아버지 윤희오(尹羲五)와 능성 구씨(綾城 具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동당(絧堂) 서응순(徐應淳)[1824~1880]과 진암(鎭菴) 박홍수(朴洪壽)[1814~1901]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37세에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인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1819~1891],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1832~1893]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최익현(崔益鉉)[1833~1906], 유인석(柳麟錫)[1842~1915]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동문으로 교유하였다. 윤석봉은 화서학파(華西學派)의 학통을 계승하였다고 자처하였다. 65세의 고령으로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가 투옥 생활로 얻은 지병이 악화되어 얼마 후인 1910년 69세로 사망하였다.
[저자의 활동]
1888년 경기도 양주를 떠나 재종숙(再從叔)[아버지의 육촌 형제] 윤건오(尹建五)[1835~?]와 함께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2년 뒤 1890년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대천리에 이주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1895년 홍주의병장 김복한(金福漢), 이설(李偰) 등 호서 지역의 남당학파(南塘學派) 학자들과 의리로서 교유하였다. 1898년에는 지역 선비들과 함께 문풍(文風)을 진작하기 위해 보령시 웅천읍 대천리에 주희(朱熹)[1130~1200,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와 송시열(宋時烈)의 영당(影堂)인 집성당(集成堂)을 세우고 의리를 강론하면서 항일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정신을 실천하였다. 1906년 최익현이 주관한 궐리사(闕里祠)[공자(孔子)를 모신 사당]에서의 강회에 참석하여 ‘처의방략(處義方略)’을 협의하여 함께 상소로 항의하고자 하였다. 또한, 민종식(閔宗植)[1861~1917]이 을사늑약(乙巳勒約)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키자 65세의 고령임에도 참여하였다가 45일간의 구류 후 풀려났다. 1907년에는 지역에서 의병을 선동하고 민심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김복한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형태/서지]
『홍경일기』는 필사본 1책 38장으로, 반초서체로 적었다. 광곽은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의 크기는 세로 21.2㎝, 가로 14.5㎝이며, 계선이 있다. 행자 수는 10행 자수부정(字數不正)[고서에서 행자수가 일정하지 않고 불규칙한 것]이며, 주(註)는 쌍행이고, 어미는 상하향이엽화문어미(上下向二葉花紋魚尾)이다. 책 크기는 세로 28.0㎝, 가로 18.0㎝이다.
[구성/내용]
『홍경일기』는 1906년 음력 4월 22일부터 윤사월을 거쳐 6월 7일까지 약 2개월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왜병의 심문에 의연한 윤석봉의 모습, 당시 의병에 참여한 유생들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 등을 비롯하여 홍주의병에 가담하게 된 계기, 체포, 투옥, 서울 압송, 심문, 석방 과정 등을 사실적으로 기록하였다.
[의의와 평가]
『홍경일기』는 1906년 홍주의병사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