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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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영어공식명칭 | Confucianism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사현 |
[정의]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서 공자의 사상을 근간으로 그 계승자들에 의해 실천된 학문적 활동과 의례적 행위.
[개설]
유교는 중국 춘추 시대 공자(孔子)[기원전 551~기원전 479]가 체계화한 사상으로 정치 사상, 학문 수양 그리고 의례 등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것이다. 맹자(孟子)[기원전 372~기원전 289], 증자(曾子)[기원전 506~기원전 436] 등 제자 및 계승자들을 통해 발전되었다.
유교는 인(仁)·의(義)·예(禮)·지(智)가 인간의 본질이며, 삶 그 자체라고 보는 ‘인사상(仁思想)’을 핵심 가치로 내세운 인본주의적인 가르침으로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이자 정치학이다. 수천 년 동안 중국·한국·일본 등 동양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보령지역의 향교]
보령 지역의 항교는 보령현의 보령향교(保寧鄕校), 남포현의 남포향교(藍浦鄕校)가 있다. 조선 말기 1895년 충청수영(忠淸水營)이 폐지되고, 이 지역에 오천군(鰲川郡)이 신설되면서 오천향교(鰲川鄕校)가 생겨서 세 개의 향교가 설립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다. 보령향교는 조선 태종 대 각 지방 군현에 향교가 건립될 때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포면(周浦面)에 있는 진당산(鎭唐山) 서남쪽 사면에 있으며, 16세기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보령현(保寧縣)」조에 따르면 현(縣)의 동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향교 중수와 관련해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1895년 향교 문루 중수(重修)를 위해 재물을 모았다는 내용이 향교 소장 『강학계복설입의(講學契復設立議)』 서문에 기록되어 있다. 1921년 전면적으로 중수를 하였는데, 이때의 기록이 1921년 작성된 「보령문묘중수기(保寧文廟重修記)」 현판과 「중수제성록(重修齊誠錄)」으로 남아 있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제향하고 있다.
남포향교(藍捕鄕校)는 1413년(태종 13) 남포현 한천[현재 웅천면] 대천리에 처음 지어졌다. 1530년(중종 25) 남포면 옥동리의 지금 위치에 옮겨 지어졌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향교 위치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후, 1635년(인조 13) 향교를 새롭게 건립하였으며, 1711년(숙종 37) 남포현 서쪽으로 위치를 옮겼으나, 1843년에 다시 원래 위치[남포현 동쪽]로 옮겨 지었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제향하고 있다.
오천향교(鰲川鄕校)는 1895년 충청수영이 폐지되고, 1901년(광무 5) 새롭게 오천군이 신설되면서, 이와 함께 향교(鄕校) 설립이 추진되었다. 1904년에 제향을 위해 공자를 비롯한 5성위의 위판(位版)과 제기(祭器)를 마련하여, 1905년에 이르러 대성전(大成殿)을 건립하였다. 대성전 건립은 이명하(李命夏), 서동익(徐東翊), 이병묵(李柄黙), 이갑승(李甲承) 등 당시 오천군수(鰲川郡守)와 함께 지역의 한양 조씨(漢陽趙氏) 및 주변 보령 지역의 유림들이 많은 역할을 하였다. 이후 동무(東廡) 등 부속 건물을 짓고, 1992년에 교육 공간인 강륜당(講倫堂)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보령지역의 서원]
보령 지역의 서원은 화암서원(花巖書院)과 신안사(新安祠)가 대표적이다. 화암서원은 1610년(광해군 2) 당시 충청도 관찰사였던 정엽(鄭曄)[1563~1625]이 서원영건통문을 보내고, 지역 사림인 구계우(具繼禹)[1558~1620] 등의 협조로 청라에 건립되었다. 1686년(숙종 12)에 ‘화암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다. 화암서원은 처음에는 보령 지방의 명현(明賢)인 토정 이지함(李之菡)[1517~1578]과 명곡(鳴谷) 이산보(李山甫)[1539~1594]를 배향(配享)하였다가, 1723년(경종 3)에는 이몽규(李夢奎)[1510~1563]를 배향하고, 고종 대 이정암(李廷馣)[1541~1600] 그리고 1971년에는 구계우를 배향하였다.
신안사(新安祠)는 1797년 현감 권상신(權常愼)[1759~1824]과 지역 유림들의 노력으로 설립되었다. 신안사 설립의 계기, 단서가 된 것은 남포현 신안면 지역의 지명이 옛날 중국 주자(朱子)가 살던 중국의 지명과 부합된다는 점과 고려 시대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이재(彝齋) 백이정(白頤正)[1247~1323]이 이 고장 출신의 학자라는 점 등이었다. 현감 권상신의 발론(發論)을 계기로 향교 재임(齋任) 김우필(金愚弼)의 이름으로 통문을 돌리고, 유림들의 노력으로 1797년 당시의 남포현 신안면에 신안사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당시 서원 설립 금령(禁令)을 어겼다 하여 관찰사 한용화(韓用和)[1732~1799]에 의해 얼마 후 훼철(毁撤)되었으나, 1807년 지역 유생들의 노력으로 중건(重建)되어 주자(朱子), 송시열(宋時烈)[1607~1689], 한원진(韓元震)[1682~1751], 권상하(權尙夏)[1641~1721], 백이정(白頤正)[1247~1323], 이제현(李齊賢)[1287~1367] 등 6명의 위패를 모셨으나 사액을 받지는 못하였다. 1867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으로 인해 훼철된 후 복설(復設)되지 못하고 터만 남아 있다.
[보령지역의 정려]
보령 지역의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는 『보령시지』에 따르면, 27건이 남아 있다고 보고되어 있다. 지역별로 남곡동에 1건, 주산면에 7건, 미산면에 3건, 웅천읍에 5건, 남포면에 2건, 청소면에 2건, 주포면에 1건, 청라면에 5건, 오천군에 1건이다. 보령 지역의 ‘충(忠)·효(孝)·열(烈)’ 인물을 처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세종실록(世宗實錄)』이다. 1431년(세종 13) 10월 28일의 기사에는 ‘감물이(甘勿伊)’에 대한 열부 기록이 있다. 실록과 함께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와 같은 지리지(地理志)에도 ‘충(忠)·효(孝)·열(烈)’ 인물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상의 문헌에서 확인되는 인물은 17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