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12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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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 强占期 保寧- 鐵道 開通- 海水浴場 開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정필준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보령 지역의 충남선 개통과 경남철도주식회사의 무창포해수욕장 개발.
[일제 강점기 철도 부설]
대한제국기부터 계획되었던 한국의 철도는 부설 주체와 운영 방식이 노선마다 달랐다. 하지만 러일전쟁 이후 군사적, 경제적 목적에서 한반도의 철도를 장악할 필요가 있었던 일본은 경부철도를 매수하여, 경의철도·마산철도와 함께 통감부에서 운영하게 하였다. 따라서 철도 부설은 대한제국이 일본자본주의 시장에 강제 편입되는 효과를 불러왔으며, 한국에 대한 침략과 수탈의 주요 도구로 활용되게 되었다.
일제는 경의철도·경부철도를 장악하자마자 경의철도 노선 개량공사에 착수하였다. 기존 노선은 군사적인 이유로 급히 건설되었기 때문에 화물운반용으로는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경의철도 개량공사를 통해 곡선반경을 줄이고, 터널과 교량을 신축하였다. 또한 1911년 압록강철교가 준공되어 경의선과 연결되면서, 경부-경의-안봉선으로 연결되는 철도 노선 구축이 완료되었다. 일제의 한국침략과 대륙진출 발판이 마련된 것이었다. 또, 일제는 한반도 내 도로와 항만 수축에 나섰다. 이를 통해 한국 내륙지방과 항만, 철도를 연결하고, 농산물 생산지역과 철도정거장을 연결하여 통치에 안전성과 신속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결국 일제는 1917년까지 2,700㎞에 달하는 도로망을 축조하고 부산, 인천, 진남포항 등 철도 거점이 있는 항구를 정비하였다.
경의선·경부선이 안정화되자 조선총독부는 일본 민간자본을 유치하여 사설철도를 육성하고자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재정적 제약을 받지 않으면서 철도 노선을 확충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21년 조선사설철도보조법이 공포되었다. 이 법에 따라 조선에 사설철도를 설치하는 민간자본은 이익부족액과 이자액에 대해 보조를 받을 수 있었다. 1920년대 금강산전기철도, 조선철도, 경남철도 등의 사철회사가 충북선, 경북선, 함남선, 충남선, 경기선 등의 사설철도를 부설하고 운영하였다.
[경남철도의 충남선 부설]
조선총독부의 사설철도 보조정책에 힘입어 부설된 사설철도는 목적에 따라 척식철도형, 산업철도형, 혼합형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충남선은 척식철도형으로 분류된다. 척식철도형은 간선철도의 배양선 역할을 했는데, 충남선은 경부철도의 배양선 역할을 하면서 반출할 자원이 풍부하고, 인구가 조밀하면서 철도교통이 미비한 지역을 관통하여, 충청남도 서부지역 일대를 철도교통망 안에 편입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충남선은 부설 필요에 따라 천안에서 군산 대안, 즉 장항까지 계획되었고, 허가되었다.
충남선을 운영하는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이하 경남철도]는 1920년 2월 자본금 1천만 엔으로 설립되었다. 본사는 천안, 지사는 도쿄에 있었으며, 영업종목은 운수 및 창고업, 온천경영, 연락선 사업 등이었다. 경남철도는 조선총독부에게 두 개 노선 부설과 운영을 허가받았는데, 하나는 충남선으로 천안-온양온천-선장-신례원-예산-홍성-광천-대천-남포-판교-서천-장항을 연결하는 노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경기선으로 천안-안성-죽산-여주-장호원으로 연결되는 노선이었다. 경기선과 충남선 모두 농산물 수송에 부설 목적이 있었다.
충남선은 총연장 144.2㎞로 군산 대안(對岸)을 기점으로 경부선 천안에 이르는 철도로 계획되었다. 측량, 설계, 토지매수 등을 시작으로 1921년 1월 제1기 선으로 천안-온양 간 16㎞를 착공하여 12월 완공하였다. 1922년 6월 온양-예산 25.6㎞, 1923년 11월 예산-홍성 21.9.㎞, 1923년 12월 홍성-광천 12.6㎞ 등이 완공되어 영업을 개시하였다. 이후 경남철도는 경기선 연결에 집중하였다가, 1929년 11월 광천-대천간 20.2㎞, 1930년 11월 장항-판교 20.3㎞, 1931년 8월 남포-판교 24.3㎞ 노선을 완공하여 종점까지 철도 노선을 순차적으로 완성하였다. 경남철도는 구간이 완료될 때마다 노선을 연결하여 개통하였다. 결국 1931년 8월 1일 천안-장항의 충남선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경남철도의 수익선 개선을 위한 노력]
충남선은 하루 7회 왕복하였으며, 시간은 5시간 5분이 걸렸다. 요금은 2등석 11원, 3등석 5원 80전이었다. 전 구간 개통 전에는 화물 수익과 여객 수익이 비슷하거나 화물 수익이 더 많았지만, 전 구간 개통 후에는 여객 수익이 더 많았다. 하지만 다른 사설 철도와 비교했을 때, 충남선의 수익성은 매우 낮았다. 적자가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경영이 매우 어려워서 조선총독부의 보조금이 아니면 주주들에게 배당을 주기 어려웠다. 조선총독부는 사설철도 보조정책에 의해 경남철도에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따라서 수익성이 좋지 않은 경남철도에 다른 사설철도보다 많은 보조금이 지급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충남선을 국유화할 계획도 세웠으나, 대장성이 예산문제로 반대했기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다.
경남철도는 수익성을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였다. 가장 먼저 한 시도는 1926년 10월 온천주식회사 매수였다. 경남철도는 온양온천을 매입하여 온천욕장 유원지를 개발하고, 온양온천역에 온천욕을 즐기기 위한 각지의 관광객을 유치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 30만 원으로 온양온천을 매수하고, 허가를 받아 주변을 개발하였다. 경남철도는 홍보를 위해 경기선이 지나는 지역의 사람들을 ‘온양온천 시찰단’으로 모집해 관광을 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1930년 장항-군산의 배 도선사업을 인수하기도 하였다. 본래 군산의 도선 수입은 향교 운영 비용으로 활용되다가 1922년부터 군산부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1930년 군산항 맞은편에 충남선이 들어오면서, 장항항이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경남철도는 철도와 연계된 도선을 운영하여 군산항과 충남선을 연계하여 운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군산부영 도선사업 양도에 군산 유지들의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경남철도에서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1928년 12월에는 자동차 운수 사업 또한 시도하였다. 경남철도는 7인승 포드 자동차 4대를 구입해 천안-온양 간 구간에 운영을 시작하였다. 가격은 충남선 천안-온양 구간 3등석 운임과 동일한 1원 50전이었으며, 하루 6회 왕복하는 천안-온천간 충남선 기차 시간 사이에 자동차를 운영하여 온천으로 사람을 실어날랐다.
그러나 이러한 경남철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정은 좋아지지 않았다. 1925년 1%대를 유지하던 운영이익률은 전 구간이 개통된 이후 1% 아래로 내려갔다. 이는 경남철도 운영에 필요한 조선총독부의 보조금이 점점 커졌음을 의미하였다. 경남철도는 경부철도주식회사, 조선총독부 철도책임자 출신들을 임원으로 영임하였다. 이들을 통해 경남철도의 경영 혁신을 꾀하는 동시에 조선총독부의 보조금이 줄어들지 않도록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경남철도의 무창포해수욕장 운영]
위기 속에서 경남철도는 온양온천 이외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을 관광 콘텐츠 확충에 나섰다. 1930년 충남선 전 구간 개통이 관성되기 전부터 당시 충청남도 보령군 웅천면[현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에 무창포해수욕장 개발에 나섰던 것이다. 바다에서 해수욕이라는 여가를 즐긴다는 생각은 대단히 근대적인 현상이었다. 전근대 바다는 노동, 생업의 공간이었으며, 해수욕은 생존, 치료의 목적에서 있어왔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서는 교통이 발달하면서 도시인들이 피서, 휴양을 즐기는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인들에 의해 1913년 부산 송도해수욕장이 최초로 개발되고, 1923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인천 월미도해수욕장을 개설하면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남만주철도회사가 경영하는 인천 월미도해수욕장은 서울과 접근성이 좋아 인기가 높았다. 당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였고, 이는 남만주철도회사의 직·간접적 수익이 되었다.
경남철도도 이처럼 해수욕장을 이용하여 수익을 올리고자 무창포해수욕장 시설에 투자하였고, 1928년 서해안 최초의 해수욕장인 무창포해수욕장이 개장되었다. 관광객이 많아지자 웅천면 유지들과 웅천면장은 힘을 합해 무창포해수욕장에 이르는 도로를 개수하기도 하였다. 경남철도는 7월에서 9월 성수기 동안 천안-웅천, 천안-대천 왕복 기차요금을 할인하여 해수욕장의 관광객 유입을 독려하였다. 일종의 프로모션 활동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에 힘입어 1932년 무창포해수욕장에는 평일 2~3백 명, 일요일 1,000명 이상의 해수욕객이 찾아오기도 하였다.
당시 무창포해수욕장은 전라북도, 충청남도, 경기도 등 지역에서 충남선과 연계되어 있는 여러 교통편을 이용하여 찾아오는 관광지였다. 경남철도는 이들을 위해 운임 할인, 직행 특별열차 운영 등의 지원을 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따라 1931년 41만 8267명이던 충남선 이용 승객은 1943년 214만 7737명을 기록하였다.
[보령해수욕장의 오늘날]
경남철도회사가 적극적으로 운영하던 무창포해수욕장 외에도 1932년 군입리[현 신흑동]에 대천해수욕장이 설치되었다. 지역개발을 열망하던 지역 유지들이 노력한 결과였다. 경남철도회사에서는 무창포해수욕장의 웅천역과 마찬가지로 대천역까지 가는 운임도 성수기에 할인하여 여객 수송 증대에 활용하였다. 무창포해수욕장과 대천해수욕장은 충남선 완전 개통의 영향으로 일제 강점기 서해안의 주요한 해수욕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8·15광복과 6·25전쟁을 겪은 1955년 충남선은 장항선으로 개칭되었다. 장항선은 사설철도 국유화 조치에 따라 소유권이 국가로 넘어갔다. 하지만 보령의 해수욕장과 장항선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장항선은 해수욕장으로 도회지의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철도청은 성수기에 늘어나는 피서객들을 위해 특별열차, 임시열차를 편성하여 운행하였다. 개인 승용차가 대중화되기 전, 철도는 서해안 해수욕장으로 휴양을 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오늘날 장항선은 서해안고속도로나 KTX 등 다른 운송 수단에 밀려 이용객과 화물운송량이 줄어들고 있지만, 충청남도 지역선을 대표하여 여전히 많은 이용승객과 화물을 운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