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0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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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영어의미역 | Japanese colonial Regim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천경화 |
[정의]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시기의 경기도 부천 지역의 역사.
[개설]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강점기는 1910년대의 무단통치기와 1920년대의 문화정치기로 불리는 민족분열통치기, 그리고 1930년대 이후부터 1945년 일제 패망까지의 파쇼통치기 등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행정구역의 개편]
부천이란 명칭은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을 통해 처음 생겨났다. 1914년 경기도 부평군의 일원이었던 석천면의 4개리, 옥산면의 7개리, 수탄면의 6개리, 상오정면의 5개리, 하오정면의 4개리, 주화곶면의 4개리, 인천부의 구읍면·서면·남촌면·조동면·신현면·전반면·황등천면·주안면·영종면·용유면·덕적면·다소면 등 12개면에 속하지 않은 지역, 강화군의 신도·시도·모도·장봉도, 그리고 만양군의 영흥면과 대부면을 통합하여 부평군의 ‘부’자와 인천의 ‘천’자을 따서 부천군이라는 행정 구역이 처음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당시 군청은 문학면 관교리에 두었으며 이후에는 계남면[수탄면·옥산면·석천면], 오정면[상오정면·하오정면·주화곶면], 소래면[황등천면]도 부천군으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1931년 4월에는 계남면이 소사면으로, 1941년 1월에는 소사면이 다시 소사읍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경제산업]
일제강점기 경기도 부천 지역의 경제산업은 농업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 1920년대 이후 일제는 산미증산계획 등 경제적 침략을 노골화하여 조선 농민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많은 조선 농민이 소작인으로 전락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정조법, 타조법, 집조법을 막론하고 생산량의 55~60%에 달할 정도의 고율의 소작료는 농민들의 경제적 파탄의 주요 요인이 되었으며 이는 부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1920년대 부천 지역의 농촌 인구 중 전체의 75%가 빈농이었으며 중농이 18.5%, 부농이 3.5%, 지주가 3%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대다수 부천 지역 농민의 경제 형편은 매우 열악하였다. 특히 1929년의 경우 경기도 부천군의 전체 인구는 조선인 96.9%, 일본인 1.8%, 중국인 1.3%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일본인의 경우 54.8%가 대부분 농업 및 목축업에 종사하는 대지주일 정도로 경제 형편이 월등하게 양호하였다.
[항일운동]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부천에서도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24일 계남면에서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하고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초차장과 판벽을 파괴하였다. 3월 26일에는 계양면 동양리, 27일에는 문학면 문학리, 3월 28일에는 영유면 관청리와 계양면 오류리 및 남동면, 4월 1일에는 대부면 신암리, 4월 2일에는 사천장, 4월 6일에는 영흥면 영흥리, 그리고 4월 9일에는 덕적면 진리에서 주민들에 의한 만세운동이 각각 전개되었다.
농민 운동과 노동자 운동을 통한 항일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저항하여 농민 운동을 주도한 부천 지역의 대표적인 농민 단체로는 1927년 10월에 결성된 부평농민조합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부천 지역의 대표적인 노동 운동으로는 1927년 9월 소사역장의 하역노동자 폭행이 도화선이 되어 시작된 조선인 노동자의 동맹파업과 1935년 6월 전매국 남동출장소 염전노동자의 동맹파업 등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학생 운동과 청년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학생 운동의 경우 주로 비밀 결사 조직을 통한 저항과 동맹 휴학 등의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청년 운동은 청년 단체의 조직을 통해 강연회, 야학회, 강습회, 토론회 등 다양한 계몽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교육]
일제강점기 부천 지역에는 총 75개의 교육기관이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공립 소학교 1개, 공립 보통학교 7개, 사립 일반학교 1개, 서당 66개였다. 학생 수는 남학생이 2,502명, 여학생이 282명이었다. 그 외 고잔리 야학을 비롯한 5개의 야학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