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3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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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영어의미역 |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이칭/별칭 | 임란,임진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정용 |
[정의]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선조 31년)까지 일본이 창원을 포함한 조선을 침략한 전쟁.
[개설]
임진왜란의 초기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전쟁 발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년) 윤 11월에 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중국 측의 사신이 파견되어 왔을 때, 영의정 등이 왕에게 올린 보고문이 주목된다. 중국에 보내기 위하여 작성된 이 보고문은 당시 조선의 전황에 대한 허위나 가감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5년) 여름 일본에서 승려 현소(玄蘇)를 파견하여 무례한 외교 문서를 전달하였다. 그 후 1592년 3월 대마도의 추장 평의지(平義智) 배가 부산에 정박하였는데, 첨사에게 전달한 글 속에는 길을 빌린다는 말이 있어 이들을 변경에서 모두 쫓아내게 하였다. 그 후 4월 13일에 일본군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고, 첨사 정발(鄭撥)·부사 송상현(宋象賢)·양산 군수 조영규(趙英珪)를 비롯한 수만 명이 전사하였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세 갈래로 길을 나누어 쳐들어 왔는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중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동로,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서로였다. 이 후 약 7년간 조선 전역은 전장으로 변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경상도는 더욱 심하였다.
전쟁이 일어나고 2년이 지났을 무렵 경상도 지역의 일본군은 울산의 서생포, 동래, 부산, 양산, 김해, 웅천, 창원 등 해안선에 집중하여 있었다. 함안과 진주 사이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죽은 사람이 무려 수만 명에 이르렀고, 일본군은 경상 좌도와 경상 우도에 걸친 수백 리에 세력을 뻗치며 약탈을 일삼았다.
[전투 현황]
창원 지역을 내습한 일본군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휘하의 2만 여 병력으로 김해와 창원, 진주를 공략하였다. 마산은 고려 충렬왕 때 합포를 회원으로 개칭한 이래 조선 건국 이후에도 회원현으로 존재하였으며, 태종 때 의창현과 회원현을 통합하여 창원부로 승격되었다. 당시 마산은 창원 도호부에 속하였다. 임진왜란 때 창원 지역의 항전 사례들은 노현(露峴) 전투와 창원성 전투, 의병장 최강(崔堈)이 분전한 안민 고개 전투, 합포 해전과 안골포 해전 그리고 웅포 해전 등이 있다.
부산을 떠난 일본군은 김해성을 함락한 후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1592년 9월 24일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경상 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은 약 2천 명을 거느리고 창원성에 있다가 보고를 받고 출동하여 노현(露峴) 일대, 오늘날의 창원시 동읍 신방리 서쪽 고지에 포진하였다. 24일 오후부터 일본의 척후병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25일 오전 10시 무렵부터는 일본군이 총포를 쏘면서 포위 작전을 펼쳤다. 이에 유숭인은 병력 차가 많았으므로 진지를 고수할 도리가 없음을 판단하고 창원성 안으로 들어와 수비하였다.
그날 늦은 밤에 일본군이 성안으로 난입하여 상호 교전하였으나 창원성은 점령당하였다. 일본군은 창원과 함안에 주둔하면서 온갖 만행을 자행한 뒤, 진주성을 포위하여 공격하고자 하였다. 창원성은 일본군이 서진하는 데 있어 우선적으로 공격과 점령의 대상이 된 곳이었다.
2. 안민 고개 전투
1593년 9월 하순경 창원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막료가 지휘하는 일부 병력이 함안 방면으로 나와 지역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농작물을 약탈하였다. 의령현에 있던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는 이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출동하였으나 대패하자, 고성에 있던 의병장 최강(崔堈)이 관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이동하다가 안민 고개에서 일본군과 맞닥뜨려 포위되었다. 이때 최강이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돌격하니 일본군은 일시 후퇴하였다. 최강은 그 틈을 이용하여 포위된 군사들을 이끌고 일시 후퇴하는 왜적들을 공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최강은 이때의 전공으로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에 발탁되고 뒤에는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를 역임하였다.
3. 합포(合浦) 해전
전라 좌수사 이순신과 경상 우수사 원균의 연합 함대는 1592년 5월 7일 옥포 앞바다에서 치른 일본 수군과의 최초의 해전인 옥포(玉浦) 해전에서 적선 26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 뒤, 거제 장목 해상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날 오후 4시 무렵 장목에서 멀지 않은 해상에 일본 수군 함선 5척이 지나가고 있다는 첩보를 받고 추격을 시작하여 합포 앞바다에서 교전하다가 일본의 대형 함선 4척과 소형선 1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4. 안골포(安骨浦) 해전
1592년 7월,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 수군에 대패한 일본 수군과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부산포에서 증파된 일본 수군 선박 등 40여 척의 함대가 웅천 안골포에 집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 수군의 지휘부는 7월 10일 새벽 이순신(李舜臣)의 함선 40척, 원균(元均)의 함선 7척,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의 함선 25척 등 모두 72척의 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안골포로 진격하였다.
조선 수군이 안골포에 도착하여 적선을 공격하였으나 지형적으로 입구가 좁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커서 공격이 용이하지 않았다. 안골포 밖으로 적선을 유인하려 시도했으나 한산도 해전에서 대패한 경험 때문에 안골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에 따라 아군은 소형 전선으로 교대로 포구에 출입하면서 일제히 공격을 하였다. 이 전투는 10일 하루 종일 계속되었으며 해질 무렵에 일본 전함 20여 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5. 웅포(熊浦) 해전
왜군들이 남쪽으로 퇴각하자 조정에서는 1593년 1월 22일과 25일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출전을 약속하고 2월 6일 좌수영을 출발하였다. 2월 7일과 8일에 경상 우수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를 중도에서 만난 이순신은 삼도 수군을 통합 함대로 편성하여 10일에 웅포(熊浦)로 향하였다. 그러나 왜군들은 1년 전의 해전에서 모두 패배하였고 해상전투는 피하는 전략에 따라 그들이 만든 진지(陣地)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왜적들의 수군 전략 변경으로 말미암아 1593년 2월 10일부터 3월 6일까지 7차례에 걸친 공격이었던 웅포(熊浦) 해전은 조선 수군의 일방적인 공격과 승리로 끝났다.
[의의와 평가]
1595년 1월 13일 웅천에서 강화교섭을 위한 회담이 진행되었으나 결렬되었고 정유재란으로 이어진 뒤에야 7년 간의 전쟁이 종결되었다. 전쟁의 참상과 비극 속에서도 외침에 저항하여 민족의 자존과 자주 의식을 유감 없이 발휘하며 외세를 격퇴한 불굴의 저항 의식과 희생 정신은 창원 지역의 전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같은 정신은 특히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지역의 의병 항쟁이 가장 활발하였고, 성과 역시 대단했던 역사적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는 장기간의 전쟁을 치르면서도 지역 주민 가운데 한 사람도 왜군에 항복한 사실이 없음을 조정에서 인정하여 창원을 대도호부로 승격하였다는 사실에서도 뒷받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