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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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民嶺戰鬪 |
이칭/별칭 | 안민 고개 전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정용 |
[정의]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민령(安民嶺)에서 의병장 최강이 일본군을 격퇴한 전투.
[개설]
안민령(安民嶺)은 창원시 안민동과 진해구의 경화동·석동을 연결하는 고개로 안민 고개라고도 부른다. 안민 고개는 진해와 창원을 잇는 지름길이자 해안과 내륙을 잇는 육로상의 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즉 웅천현에서 창원부 읍성에 이르는 육로상의 지름길이었다. 이곳에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 최강이 일본군을 격퇴한 안민령 전투(安民嶺戰鬪)가 발생하였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중 조선이 명군의 지원으로 평양성을 탈환한 후 왜적과의 전투는 소강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 각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들은 떼를 지어 살인, 강간 , 약탈과 같은 만행을 상습적으로 저질렀다. 또한 점령지 지역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농작물을 약탈하고 있었는데 함안에서 왜병들의 농작물 약탈을 저지하기 위하여 관군이 출동했다가 패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최강(崔堈)이 의병을 이끌고 왜병을 공격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경과]
1593년(선조 26) 9월 하순경 창원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막료가 지휘하는 일부 병력은 함안 방면에 나와 지역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농작물을 약탈하였다. 의령현에 있던 전라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출동하였으나 대패하여 선거이는 왜적의 조총에 맞아 부상당하고 군사들은 패퇴하였다. 고성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장 최강(崔堈)은 이 소식을 접하고 관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급히 이동하던 중 김해에 있던 왜장이 거느리는 군사와 안민령(安民嶺)에서 만나게 되었다. 당시 최강은 이곳에 미리 복병을 배치해 놓았으나, 왜적은 오히려 복병을 기습하게 되고 의병장 최강 이하 모든 군사가 적의 포위망에 걸려 들어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 최강은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돌입하여 적을 공격하니 왜군이 후퇴하였다. 최강은 단기로 적중에 돌입하여 종횡무진 분전하여 전신이 적의 피로 물들었으며, 이 틈을 이용하여 포위된 군사들을 이끌고 후퇴하는 왜적들을 공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결과]
의병장 최강이 분전한 안민령 전투에서 아군의 손실은 거의 없었다. 최강은 이 전투에 이어 전후 수차의 격전에서 역전을 되풀이하였는데, 그의 위용은 무적에 가까워 명성이 남쪽 지방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안민령 전투는 아군의 복병이 적의 기습을 받고 주력군이 왜적에게 포위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보여준 의병장 최강의 용기와 그를 따랐던 의병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보여준 전투 사례이며, 왜적을 격퇴하고자 한 확고한 의지와 실천이 국난극복의 힘이 되었다.
최강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 싸움에서 공을 세웠고, 1593년 안민령 전투에서 적을 격퇴하였으며, 1594년 고성에서 왜군과 싸우는 등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공적이 평가되어 1605년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로 승진하였고, 1606년 경상좌수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는 충청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선조실록』과 『광해군일기』 등에 기록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