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3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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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1862年農民抗爭 |
영어의미역 | Changwon Peasant Opposition in 1862 |
이칭/별칭 | 임술년 창원민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정용 |
[정의]
1862년에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항쟁.
[개설]
1862년(철종 13) 11월 창원에서 일어난 농민봉기로, 19세기 세도정치 아래, 창원 지역 또한 삼정(三政)이 문란하고 이 지역 관리들의 농민들에 대한 탐학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면서 삼정 중 특히 환곡의 폐단에 대한 시정 요구가 수용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그 해 삼남 지방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난 농민항쟁 중 하나이다.
[역사적 배경]
19세기경 창원은 논이 넓은 편이어서 쌀의 생산량이 많고, 수령들의 수탈이 심했다. 농민항쟁 발발 당시 부사이던 서상악은 이무(理貿) 및 가작(加作)을 통해 총 16,195냥을 착복했다. 전(前)부사 구성희는 4,845석을 이무하여 그것을 돈으로 바꾼 14,537냥을 모두 착복하고 대신 쭉정이로 그 수를 채워놓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봉기는 가장 가혹했던 환곡의 폐해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2차례에 걸쳐 발발했다.
[발단]
1862년 농민항쟁은 11월의 환작전(還作錢)이 과다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그 해 7월에 김석주(金石柱) 등이 환폐를 바로잡는 데 대한 방안의 소를 올렸으나 시정되지 않았다.
[경과]
진주와 이웃한 창원은 진주항쟁의 소식을 접하고, 김석주·김태수·김종길·김동길 등이 장두가 되어서 각 면에 통문을 돌리고 여론을 모았다. 그러나 관에 대한 공격은 하지 않았고, 주모자들은 곧 체포되어 암행어사 이인명에 의해 혹독한 형벌을 받고 풀려났다. 창원부사 서상악은 경상도 문경으로, 구성희는 전라도 진안현으로 유배당했다.
이 후 조정에서는 삼남 지방 민란의 원인을 삼정의 문란으로 파악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삼정제도를 바로잡기 위한 대책을 강구함에 따라 그해 6월 10일 ‘삼정이정절목’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시행안도 보수적인 지배층의 반발에 부딪쳐 3개월 남짓 시행되다가 10월 29일에 전면 폐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창원 지역 농민들은 11월 28일 동면(東面) 금산(琴山)에 사는 김대종(金大宗)이 중심이 되어 환곡을 돈으로 환산한 액수가 너무 많으니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용의 통문을 돌렸고, 많은 농민들이 여기에 호응하여 몽둥이로 무장하고 읍으로 몰려갔다. 한편 관아에서는 주동자를 잡아들이려다가 실패하자,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보름 후인 12월 14일에는 서면 감천(甘泉)의 김동길(金東吉), 중리(中里)의 정의지(鄭義之)가 다시 농민들을 모아 각 고을을 돌면서 징벌·위협하며 집에 불을 지르고 다녔는데 하룻밤 사이에 무리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3일 뒤인 17일에 농민 수가 수천 명에 이르러 수탈자의 집을 불태우는 등 본격적으로 공격했다.
이들은 면임(面任)을 지낸 자의 집과 좌수의 집을 우선 방화하고, 18일에는 네 개 면의 농민들이 모여들어 남산을 방화하고 성중에 들어가 관리들의 집을 불태우고, 다시 성 밖으로 나와 향임(鄕任)을 지낸 자의 집을 방화하는 등 강경한 행동을 일삼았다. 이후의 전개과정에 대하여는 자료가 부족하여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다른 지역의 농민항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
1862년 농민항쟁은 당시 빈발했던 다른 지역의 농민항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다른 지역의 농민항쟁과 마찬가지로 농민들의 요구사항은 정책적으로 수용되거나 반영되지 못하였고 항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의의와 평가]
1862년 농민항쟁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으나 치열한 항쟁을 통하여 농민들이 봉건지배체제의 모순을 깨달아 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