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10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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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好益 |
영어음역 | Jo Hoik |
이칭/별칭 | 사우(士友),지산(芝山),정간(貞簡),문간(文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지개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민긍기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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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지개리 |
성별 | 남 |
생년 | 1545년 |
몰년 | 1609년 |
본관 | 창녕 |
대표관직 | 선산부사 |
[정의]
조선 중기 창원 출신의 문신.
[가계]
조호익(曺好益)[1545~1609]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芝山). 아버지는 조윤신[1511~1571]이고, 어머니는 인동장씨(仁同張氏)[?~1572]로 선략장군(宣略將軍) 장중우(張仲羽)의 딸이다. 다섯 아들 중 넷째로 태어났다.
[활동사항]
조호익은 1576년(선조 9)에 경상도도사 최황(崔滉)이 군적(軍籍)을 정리할 때 검독(檢督)에 임명되었으나 친상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이에 최항이 노하여 토호(土豪)라고 상주하여 강동(江東)에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 그 후 호조정랑이 된 데 이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소모관으로 왜적과 여러 차례 싸운 공을 세워 1593년(선조 26) 대구부사가 되었고, 1594년(선조 27) 성주목사가 되었으며, 1595년(선조 28) 안주목사가 되었다. 1596년(선조 29) 성천부사가 되었으며, 1599년(선조 32) 정주목사가 되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강동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웠고, 1604년(선조 37)에 선산부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영천군(永川郡)으로 내려가 학문에 힘쓰다가 그곳에서 1609년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문인이다. 당시 이황의 대표적 문인으로 잠곡(潛谷) 김육(金堉)[1580~1658]이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심경질의(心經質疑)』와 『가례고증(家禮考證)』, 『지산집(芝山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대재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정간(貞簡)이었다가 후에 개시되어 문간(文簡)이 되었다. 경상북도 영천군의 지봉서원(芝峰書院), 평안남도 성천군의 학령서원(鶴翎書院), 강동(江東)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봉향되었다. 학령서원은 1660년(현종 1)에 사액되었고, 지봉서원은 1678년(숙종 4)에 사액되면서 도잠서원(道岑書院)으로 이름을 바꿨다. 인조반정 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