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2046 |
---|---|
한자 | 朝鮮時代慶南首都-昌原大都護府 |
영어의미역 | Gyeongnam Capital of Joseon Period, Changwon-daedohob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최정용 |
[개설]
창원은 조선시대에 들어 그 읍격이 승격하였다. 창원부로 시작하여 1415년(태종 15)에 창원도호부로 개칭하였다가 임진왜란을 겪은 후인 1601년(선조 34)에 창원대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에 창원이 행정·군사의 중심 지역이자 경상남도 일대의 수도로 그 위상이 올랐음을 의미한다. 문묘의 전패(殿牌)가 분실된 사건을 계기로 9년 남짓 창원현으로 격하된 적이 있었지만, 다시 창원대도호부로 승격되어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였다. 오늘날 창원시가 경상남도청이 소재하여 경상남도 일대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한 정치적·행정적 모체는 바로 창원대도호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원대도호부가 되기까지]
1392년 조선왕조가 건국되었다. 신생 국가 조선은 성리학을 표방하면서 강상(綱常)과 명분 및 의리를 중시하고, 중앙집권적 양반관료 사회를 확립해가기 시작하였다. 유교적 정치제도의 바탕 위에서 덕치와 인정(仁政), 위민과 민본을 토대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면서 유교적 이념을 구현해가고자 하였다.
고려시대 이래 지방은 군현제도의 바탕 위에서 운영되었다. 고려 중기 이후 속현에 대한 감무관(監務官)의 계속적인 파견과 속현 및 향·소·부곡 등의 개편 내지 정리 작업을 통해 군현제도는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현제도에 대한 본격적인 정비는 조선 전기 태종 대를 전후한 15세기에 실시되었다. 이원적인 고려의 도제(道制)를 일원적인 8도 체제로 개정하였고, 신분적이고 계층적인 군현 체계를 명실상부한 행정구역으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속현과 향·소·부곡 등을 정리하여 작은 현들을 병합하였으며 군현의 이름을 개정하는 등 지방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였다.
또한 종래의 감무를 양반 출신의 현감으로 대체하고 수령의 직급을 올려 이들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종래 군현의 실질적인 지배자 위치에 있었던 향리를 점차 지방 관아의 행정 사역인으로 격하시키는 등 향촌 지배 세력의 교체와 함께 양반 주도의 지방 지배 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왕조 교체에 따른 시대적 변화 속에서 창원은 어떠하였을까. 창원은 본래 굴자군(屈自郡)인데, 신라 경덕왕이 의안군(義安郡)으로 고쳤다. 회원현(會原縣)은 본래 골포현(骨浦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합포(合浦)로 고쳐서 의안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인 1018년(현종 9)에 두 현을 모두 금주(金州) 관하에 붙였다가 뒤에 각기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1282년(충렬왕 8)에 의안을 의창(義昌)으로, 합포를 회원으로 고쳐서 모두 승격시켜 현령을 두었다. 이는 일본을 정벌할 때 물자를 공급한 공로를 표창한 것이었다.
조선 건국 후 1408년(태종 8) 7월 처음으로 의창과 회원의 두 현을 합하여 창원부(昌原府)로 하였다. 윤자당을 진주상주도 병마도절제사겸창원부판사로 임명하였다. 병마도절제사는 종2품 벼슬이다. 1408년(태종 8) 8월 창원부에 판관을 두었는데, 판관은 부와 각 도의 감영 및 주요 고을에 둔 종5품 벼슬이다. 1415년(태종 15)에 창원도호부로 개칭하였다가 1601년(선조 34)에 창원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이는 창원이 행정과 군사의 중심 지역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창원대도호부의 관할 지역은 강릉·안동·안변·영변 그리고 창원이었다. 창원이 대도호부로 승격되고 60년이 지난 후인 1661년(현종 2)에 문묘의 전패(殿牌)가 분실된 사건을 계기로 창원대도호부는 창원현으로 격하하여 현감이 파견되었다가 9년 후인 1670년(현종 11)에 창원대도호부로 다시 환원되어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였다.
[창원대도호부로 승격된 까닭은 무엇일까]
창원이 대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창원 지역의 역사적 성격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해안에 위치하고 있던 지리적 환경에 따른 창원과 그 주변부의 상황을 왜인과 연관하여 알아보면서 창원대도호부로의 승격과 연관된 역사적 성격을 추출해 본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변경 지역을 넘나드는 왜구의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해안에 위치하고 있던 창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창원과 그 주변부의 왜구 문제는 상존하는 우려 사항이었으며 그에 비례하여 효과적인 방어책의 일환으로 축성 문제도 계속 제기되고 있었다.
창원 출신인 최윤덕의 부친 최운해는 1396년(태조 5)에 경상도병마도절제사에 임명되어 장기에서 왜적과 싸웠고 영해에서 왜적을 공격하였다. 왜적의 배 60척이 영해 축산도에 이르렀는데, 그들이 조선의 관찰사에게 글을 올리기를 “항복하려고 하는데 만약 변경 땅의 한 구석에서 살기를 허락하고 식량을 준다면 딴 마음을 먹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왜적의 우두머리 5명이 수백 명의 부하와 함께 모두 갑옷을 벗고 배에서 내렸는데, 항복의 말이 오가는 과정에서 서로를 불신하여 왜적들이 조선 관료를 붙잡아 도망가 버렸다.
합포의 군관들도 수년째 왜적을 방어하고 있었지만, 1397년(태조 6) 수많은 왜적이 육지에 내렸을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고 그들이 도망가는 것도 잡지 못하였다. 개국 이래 왜적 대응책에 고심하던 조선은 왜적에 대해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1419년(세종 1)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 영의정 유정현을 삼도도통사, 최윤덕을 삼군도절제사에 임명하여 군사 작전을 전개하였다. 최윤덕이 내이포에 도착하여 군사들을 엄격히 단속하면서 내이포에 있는 왜인들을 붙잡아 먼 고을로 나누어 보내고 그 중에서 흉악하여 통제할 수 없는 자 21명을 처단하였다. 이 군사 작전의 연장선상에서 1419년 7월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8월에는 승전으로 이끈 장수들을 위로하였다.
왜관이 있던 내이포는 일본과 오가는 주된 통로로 창원과 접한 곳이다. 대마도의 상선들도 많이 넘나드는 곳이다. 왜인들이 많이 출입하고 그들의 배가 정박하는 동안 왜인에 대한 물자 공급을 맡은 인근 고을들은 특히 농사철에 많은 폐단을 겪어야 했다. 창원도 직접 그 폐해를 받는 지역이었다. 세종 당시 내이포에는 장사하는 왜인 600여 명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창원은 내이포에서 서울로 가는 주된 통행로였다.
문종 당시에는 내이포·부산포·염포 등지에 사는 왜인들이 2,000여 명이었고, 세조 연간에도 제포(내이포)에는 92호수에 416명의 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중 늙고 약한 자를 제외하면 건장한 자가 114명이었다. 여러 곳에서 사명을 띠고 와서 제포에 머물러 있는 자가 2,011명이었으며 장사치도 많아서 이들을 모두 계산하면 상주 왜인은 수천 명에 달하고 있었다. 1430년(성종 12)에는 제포에 308호수에 1,722명의 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조선 관리를 붙잡아 도망가는 왜적과 내이포 등지에 상주하고 있는 왜인의 규모와 위협적인 형세로 인해, 혹시 이들이 변란을 일으키지는 않을지 또는 만약 뜻밖의 일이 생겨 이들이 해상과 육지에서 함께 들고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할 지가 늘 우려되고 있었다. 또한 왜인과 왜적은 구분해야 하지만 이들의 구분이 명확했던 것은 아니었고, 바다 연변에는 주민들이 조밀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왜구들이 배에서 내리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노략질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구 방어책의 일환으로 1410년(태종 10) 창원부에 염산산성(簾山山城)을 수축하였다. 이 석성(石城)은 창원부의 남쪽에 위치하며, 높고 험하며, 둘레가 1천 70보인데, 안에는 내(川)가 1개, 개울이 1개가 있었다. 1430년(세종 12) 연말에는 합포의 성을 쌓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합포에는 창원부 병마절제사의 군영이 있었다. 바다 어귀에서 4리 거리에 있는데, 둘레가 588보였다. 절제사 군영의 성은 둘레가 3,775자, 높이가 12자 6치, 성가퀴의 높이가 1자 8치이며 적대는 12개이고 성문은 4개인데 옹성이 있으며 성가퀴는 635개이고 해자의 둘레는 4,060자이며 성안에 우물이 7개가 있었다.
세조 때 읍성(邑城)을 쌓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창원은 절제사의 군영과 아주 가깝고 절제사 군영의 성곽이 넓기 때문에 따로 읍성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있어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당시 군자감 창고는 군영의 성곽 안에 있었으나 의창은 부에 있었으므로 군영의 성곽 안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창원의 읍성은 1476년(성종 7)부터 쌓기 시작하여 1477년(성종 8) 10월에 완공했는데, 높이가 12척 7촌이고 둘레가 4,410척이었다. 본 고을에 살고 있는 백성이 읍성을 쌓아 백성들의 고역과 부담이 많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축성을 통한 방어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으나, 왜구의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왜구들은 옷을 바꾸고 말씨를 바꾸어 여러 고을로 횡행하면서 전횡을 일삼았고, 결국 1514년(중종 5)에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켰다. 그간의 우려가 삼포왜란으로 현실화된 것이다. 삼포왜란 때 살해된 사람은 272명, 소실된 가옥은 796구였다. 왜인들의 거점이었던 내이포(제포)와 인근 창원부의 주민들은 삼포왜란의 중심부에 있었다.
삼포왜란 이후 창원과 창원부의 주민들이 보다 직접적이고 장기간에 걸쳐 왜구로부터 큰 피해를 받게 되는 사건은 임진왜란이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고, 첨사 정발(鄭撥), 부사 송상현(宋象賢), 양산군수 조영규(趙英珪) 등 많은 장수들이 전사하였다. 함안과 진주 일대에서 전사한 조선 군사들은 무려 수 만여 명에 달하였고,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에 걸친 수백 리에 달하는 지역이 약탈당하였다. 창원 지역을 내습한 왜적은 구로다[黑田長政]의 제3군 휘하의 병력이었으며 김해·창원·진주를 공략하였다.
창원 지역의 항전 사례로는 1592년(선조 25) 9월 24일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이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왜적 2만여 명과 교전한 노현(露峴) 전투 및 창원성 전투가 있다. 중과부적으로 창원성은 점령당하였고 왜적은 창원과 함안에 주둔하면서 온갖 만행을 자행하면서 진주성을 포위하여 공격하고자 하였다. 창원성은 왜적들이 서진하는데 있어 우선적으로 점령해야 할 곳이었다. 다음으로는 1593년(선조 26) 9월 하순경 의병장 최강(崔堈)이 분전하여 왜적들을 격퇴한 안민고개 전투가 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경상우수사 원균의 연합 함대가 1592년(선조 25) 5월 7일 옥포 앞바다에서의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적의 함선 26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 뒤 거제 장목 해상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날 오후 4시경 장목에서 멀지않은 해상에 왜군의 함선 5척이 지나가고 있다는 첩보를 받고 추격을 시작하여 합포 앞바다(의창군 내서면 산호리)에서 교전하여 적의 대형 함선 4척과 소형선 1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린 합포 해전이 있다.
1592년(선조 25) 7월,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 수군에 대패하여 패주하던 왜군 함선과 부산포에서 지원을 받아 증파된 왜군의 증원 함선을 조선 수군의 연합 함대가 웅천만에서 섬멸시킨 안골포 해전이 있다. 40여 척의 왜 함대가 안골포에 집결해 있다는 적정을 탐지하고 7월 10일 새벽 이순신의 함선 40척, 원균의 함선 7척,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선 25척 등 모두 72척의 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안골포로 진격하여 왜의 함선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는 7월 10일 하루 종일 계속되었으며 해질 무렵 왜군 전함 20여 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렇게 전쟁의 참상과 비극 속에서도 창원 지역민들은 외침에 끝까지 저항하고 있었다. 또한 장기간 전쟁의 와중에서도 창원 지역 사람들, 병사(兵使) 겸 부사인 김응서(金應瑞)와 그를 따르는 민관군 중에 한 사람도 왜군에 항복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보고로 임진왜란 후 창원은 행정과 군사의 요충지인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창원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 왜구로 인한 고통을 심하게 받던 지역이었다. 조선 건국 이후 평온한 적도 있기는 했으나 삼포왜란 등을 거치며 임진왜란 동안 그 고통은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창원 지역민들은 왜인에 대한 물자 공급과 왜구의 위해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고 있었고, 축성의 과정에 동원되는 등 물적·신체적 부담을 감당하고 있었다. 왜인과 왜구들로 인해 지속적으로 겪어야 했던 창원부 지역민들의 부담과 고통은 본능적으로 그들에 대한 방어 심리와 저항 의식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동안 창원 지역민들 중에서 한 사람도 왜적에게 항복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경험을 통하여 축적된 왜구에 대한 항거심과 적개심이 구체화되어 나타난 결과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평가되어 1601년(선조 34) 대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이 사실은 지역민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한 표창의 의미였던 것이다.
[창원부사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창원 지역의 행정을 담당한 최고 관료인 창원부사에 대하여 알아본다. 한 지역을 담당한 관료들의 자질과 재직 상황은 그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과 직접 관계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17~18세기는 붕당이 지속되면서 숙종 대 갑술환국 이후에는 서인의 일당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고, 정조 연간의 변동을 거치면서 19세기에는 세도 정치로 변모해 갔다. 붕당과 세도 정치의 전개에 따른 중앙 정치의 불안정과 권력의 집약은 조세 제도의 문란과 지방관의 지역민에 대한 수탈을 과중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농민 항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 후기 상황에서 지방관들의 근무 상황이 어떠했을 것인지는 짐작되지만, 창원부사의 자질과 관련해서는 각종 제도의 정비 속에서 비교적 내정이 안정적으로 기능하고 있던 임진왜란 이전까지도 만족스러운 것이 못되었다. 창원부 설치 이후 임진왜란 발생까지 실록에 나타나는 창원부사의 자질과 관련된 논란의 대부분은 이들의 불법 행위와 무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사헌부 등 해당 기관으로부터 규탄을 받는 유형은 탐욕과 포악한 행위, 형벌 남용 사례, 무능, 성질이 경솔하고 조급함, 부적격자, 간교함 등이었고, 문책과 처벌의 형태는 교체, 고문, 구속, 형장 100대와 임명장 회수, 파면, 파직 등이었다. 이러한 결과가 초래된 데에는 세종 때 시행한 그 지역 백성이 자기 고을의 수령을 고발할 수 없다는 부민고소금지법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유능한 사람을 적재적소에 임명하지 못한 인사 행정의 실패, 그리고 창원부사들의 국가관과 애민관의 부족이 주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많고 지역이 컸던 창원을 감당할 수 있는 부사의 조건은 대략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근면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어야 했고, 둘째는 바닷가에 있는 창원은 왜인들이 오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변란이 생기면 바로 적의 공격을 받는 곳이었기 때문에 무예적 능력을 겸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조건의 경우, 1593년(선조 16) 2월 이후에 창원과 같이 바다를 끼고 있는 고을의 문관 수령을 모두 무관 수령으로 교체한데서 나타나듯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규탄 받은 유형에서 확인되듯이 첫째 조건의 결핍이 주된 원인이었으며, 그 영향은 고스란히 창원의 지역민에게 전가되어 지역 발전을 해치고 삶의 질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중종 연간에 창원부사를 역임했던 신공제(申公濟)는 근면과 근신 및 청렴과 재능으로 평가받아 1516년(중종 11) 포상되었는데, 대표적인 칭송 사례에 해당한다.
이어서 창원부사의 재직 상황을 살펴본다. 『창원부읍지』에 의하면 역대 창원부사를 역임한 사람은 모두 191명이었다. 이 중 문관 출신 42명, 무관 출신 144명, 음관 출신 1명, 불명확한 자 4명이었다. 문관 출신 42명 중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교체된 경우가 33명으로 78.5%를 차지하고 있다. 무관 출신도 144명 중 127명이 임기와 무관하게 교체되어 교체율이 88.1%에 이른다.
이러한 현상은 왜란과 호란 등 빈번한 전란과 붕당 등 정치적 요인과 맞물려 있다. 그러나 임기 내 교체의 거의 절반은 그 사유가 징계였다. 징계를 받아 파면되거나 해직된 자가 88명으로 47.4%나 된다. 그 유형은 재임기의 고과 성적 때 하등을 받는 경우, 상부 기관에서 장계를 올려 파면시키는 경우, 대간 등에서 탄핵을 받아 징계와 파면을 당한 경우, 전날의 범죄 행위와 암행어사에 의해 비리와 불법이 적발되어 파직당하는 경우 등이다.
창원부사 191명의 출신지는 서울 출신이 112명으로 58.6%를 차지하고 있고, 청주 출신이 6명, 성주 출신과 남양 출신이 각각 4명, 공주 출신이 3명이다. 그리고 개성·금화·홍천·수원·여주·철원·밀양·통진·의성·금주·합천·포천 등지의 출신이 2명씩이며 나머지 32곳에서 각 1명씩이다. 특정 지역 출신자가 압도적 우위를 보이는 현상은, 세도 정치의 영향을 고려할 때 창원부사로 임명된 자들이 공익을 우선하기보다는 가문과 문벌 및 개인의 영달을 추구했을 가능성이 많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대도호부에는 대체로 정3품의 부사가 임명되고 그 아래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90명, 인리 40명, 지인 17명, 사령 20명, 군졸 14명 그리고 관노 37명과 관비 16명이 예속되어 있었다. 이러한 위상에 부응하는 부사의 자질과 역할이 요구되는 것이겠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부사들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실상은 창원의 지역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었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전근대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일반 양인을 중심으로 볼 때 창원 지역 주민들의 생활환경과 삶의 질은 그다지 만족스러운 것은 못되었다. 부로 승격되는 과정에서 자질이 우수한 고급 관료가 부임하여 지역 발전과 지역민에 대한 처우 개선 등을 도모했을 것을 기대할 수 있겠으나, 창원 지역에 부임한 부사들의 부정적인 자질은 오히려 지역민들의 삶의 질을 저해하는 나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역민들에게 부과된 세금과 역의 의무도 상대적으로 증가하였을 것이며, 누적된 모순들이 개선되지 못하는 상황과 관료들의 부정적인 근무 실태가 맞물려 19세기에는 창원 지역에서도 농민 항쟁이 촉발되고 있었다.
[창원대호부를 상징하는 유적, 창원읍성]
조선시대 읍성은 지방 행정 중심지에 구축하여 지역 주민과 관아를 보호하며 행정적, 군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창원읍성은 조선시대 창원대도호부의 외곽을 옹위하는 성이다. 창원에 읍성을 쌓는 문제는 세조 때 제기되었다. 그러나 창원은 절제사의 군영과 아주 가깝고 절제사 군영의 성곽이 넓기 때문에 따로 읍성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있어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476년(성종 7)부터 쌓기 시작하여 1477년(성종 8) 10월에 읍성을 완공하였고, 170여 년 후인 1649년(효종 즉위년) 10월에 개건(改建)되었다.
『창원부읍지』에 의하면, 창원읍성은 석축으로 둘레는 2,004척, 곡성(曲城)이 18곳, 옹성(甕城)이 4곳, 여첩(女堞)이 600곳, 남문은 진남루(鎭南樓), 동문은 향양루(向陽樓), 서문은 망미루(望美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하였다. 또한 북수문(北水門) 안에는 우물 두 곳과 못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1621년 4월에 창원부사 금변(琴忭)이 쌓았다고 하였다.
창원읍성은 현재 창원의 도시화 과정에서 심하게 훼손되었다. 동문지로 추정되는 가장 잘 남아 있는 부분의 성벽을 따라 주택 사이사이에 있는 성의 기단부를 따라 남문지까지는 성벽의 상부는 결실되었지만 성벽의 기단부 1단 정도가 잔존하고 있다. 오늘의 창원시를 가능케 한 정치적·행정적 모체는 창원대도호부였고, 그것을 대표하는 유적이 창원읍성임을 고려할 때 그 상징적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창원대도호부의 행정체계는 어떠했을까]
창원대도호부의 관할 구역은 시기에 따라 폐합과 이속 등에 따른 변동이 있었다. 대도호부가 되면서 칠원군이 통합되었다가 1617년(광해군 9)에 분리되었고, 1627년(인조 5)에는 진해가 소속되었다가 2년 뒤 분리시켰다. 대체로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김해까지 17리, 서쪽은 함안까지 27리, 남쪽은 김해 관하인 웅신(熊神)까지 32리, 북쪽은 칠원까지 24리였다.
인구 현황은 조선 전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호수가 1,094호이며 인구는 4,955명이다. 이 인구수는 여자는 제외된 남자의 숫자로 판단된다. 조선 후기의 자료인 『여지도서』에는 총호수는 7,344호이며, 인구는 28,309명으로 전기에 비하여 상당한 증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창원을 본관으로 하는 토성은 공(孔)·황(黃)·박(朴)·현(玄) 씨였다.
창원대도호부의 행정구역은 각 고을들을 5개의 면(面)으로 분류하였다. 면의 이름은 대개 동서남북의 방위면을 사용하였다. 편의성 때문이었다. 면 아래에는 운(運)을 두었는데 창원도호부에서는 방(坊)을 운이라고 하였으며 모두 16개의 운을 설치하였다. 운의 이름은 일·이·삼 등과 같이 순서대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운 아래에는 리(里)를 두었는데 모두 120개의 리를 소속시켰다.
창원대도호부 내에는 교통 시설인 4곳의 역(驛)과 숙박 시설인 9곳의 원(院)을 운영하였다. 역은 역마(驛馬)와 역로(驛路)를 관리하고 공무로 지방을 다니는 관리에게 역마와 숙식 등을 제공하였다. 창원대도호부에서 운영된 4곳의 역은 자여역(自如驛)·신풍역(新豊驛)·근주역(近珠驛)·안민역(安民驛) 등이었다. 원은 지방 관아 근처나 역 주변 및 각 역과의 중간 지역 등에 설치한 숙박 시설이다. 창원대도호부에서 운영된 9곳의 원은 선원(禪院)·안민원(安民院)·임견원(臨見院)·감계원(甘界院)·전현원(錢縣院)·의장원(儀仗院)·안성원(安城院)·적옥원(迪屋院)·영빈원(迎賓院) 등이었다.
창원부의 정군사수는 모두 860명이었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52명, 영진군(營鎭軍)이 119명, 선군(船軍)이 689명이다. 창원부의 군사 중 창원의 관아와 읍성에 배치된 군사는 군관 71명, 수성군 15명으로 모두 86명이 배치되었고, 합포에는 진군 20명, 기선군 200명, 보병 300명이 배치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군제가 개편되면서 나타난 5군영 체제 하의 창원대도호부 정군사는 모두 2,544명이었다. 어영정군 80명, 금위정군 110명, 병조보병 52명, 봉수군 150명, 마병 213명, 속오군 487명, 별대 45명, 아병 102명, 단사분방군 336명, 수군 713명, 육군 256명 등이었다. 대도호부의 읍격에 비례하여 거의 3배 가까이 증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