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2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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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載巖城 |
이칭/별칭 | 보성부(甫城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고대/남북국시대 |
집필자 | 김호동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930년 - 재암성 장군 선필이 고려에 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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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할 지역 | 재암성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파천면 |
[정의]
경상북도 청송 지역에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남북국시대의 지명.
[개설]
재암성(載巖城)은 930년 장군 선필(善弼)이 고려에 귀부(歸附)할 때까지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파천면 일대에 있던 지명이다. 보성부(甫城府)의 다른 이름으로 호족(豪族)이었던 선필의 근거지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재암성의 설치 경위는 명확하지 않다. 남북국시대 재암성은 장군 선필의 근거지였다. 보성부를 재암성이라고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재암성은 757년(경덕왕 16) 두어졌던 진보현(眞寶縣)·진안현(眞安縣) 일대에 선필 세력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후기와 후삼국을 거쳐 고려 전기까지 지방에 자립한 채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유력자를 호족이라고 부르는데, 문헌에는 장군 또는 성주(城主)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지방에서 성을 쌓아 자신들의 근거지를 자체적으로 수호하고, 이를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는 의미에서 자칭·타칭으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 불렀던 것이다.
[관련 기록]
재암성에 대한 자료는 매우 소략하다. 조선시대 때 간행된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재암성의 존재가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고려사』 권57, 지(志) 제11, 지리(地理) 2, 경상도(慶尙道) 예주조(禮州條)에 “보성부[재암성이라고도 함]는 신라 경덕왕이 칠파화현(七巴火縣)을 진보현으로, 고구려 때의 조람현(助攬縣)을 진안현으로 고쳤는데, 고려 초에 이 두 개 현을 합쳐 보성부를 설치하였으며, 현종(顯宗) 9년에 본 주에 소속시켰다.”라고 나타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5, 경상도 진보현, 건치연혁조(建置年革條)에는 “칠파화현을 신라 경덕왕이 진보로 고치고,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조람현을 경덕왕이 진안으로 고치고, 야성군(野城郡)의 영현으로 삼았는데, 고려 초에 두 현을 합하여 보성부를 설치하였다. 어떤 이는 재암성이라고도 한다. 현종은 예주에 귀속시켰는데 뒤에 왜구(倭寇)로 인하여 주민이 모두 없어졌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별집 권16, 지리전고(地理典故), 주군(州郡), 진보(眞寶)에는 “칠파화현을 신라 때 진보로 고쳤고, 조람현은 진안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두 고을을 합하여 보성부를 두었는데, 재암성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고려사절요』 권1, 태조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 경인(庚寅) 13년, 봄 정월 기사에는 “재암성 장군 선필이 와서 의탁하였다.”라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변천]
재암성이 있던 진보현과 진안현은 통합되어 고려 전기 보성부로 승격되었다.
[의의와 평가]
남북국시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지방에는 호족이라는 독자세력이 존재하였다. 그중 재암성은 왕건에 의탁하였던 선필의 근거지였다. 고려 전기 재암성이 있던 진보현과 진안현을 합쳐 보성부로 설치하였다는 기사로 미루어 볼 때, 보성부로의 승격은 재암성 성주 선필의 공을 감안하여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