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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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眞寶義陣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896년 4월 - 진보의진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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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896년 8월 - 진보의진 해산 |
발생|시작 장소 | 진보의진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
종결 장소 | 진보의진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
성격 | 의병 부대 |
관련 인물/단체 | 허훈|신상익 |
[정의]
1896년 4월 경상북도 진보군 지역에서 결성된 의병 부대.
[개설]
진보의진(眞寶義陣)은 1896년 4월 7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 출신의 방산(舫山) 허훈(許薰)이 창의하였던 의병진이다. 창의 이후 주변 의병진과 협조 체제를 형성하고 활동하였다.
[역사적 배경]
1894년 갑오변란(甲午變亂)과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 변복령(變服令), 단발령(斷髮令) 등을 계기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개화파 관료집단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친일내각과 일본 흉적(凶賊), 그리고 단발을 강행하는 지방관리인 왜관찰사(倭觀察使), 왜군수(倭郡守) 등을 표적으로 안동을 비롯한 관할 16개 군 중 14개 군에서 각기 의병진이 결성되었다.
[경과]
1894년 방산 허훈은 아우 왕산(旺山) 허위(許蔿)와 함께 동학농민군을 피해 진보 흥구(興邱)[지금의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흥구리]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던 중,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발포(發布)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곧이어 1896년 1월 20일 안동에서 권세연(權世淵), 김도화(金道和), 김흥락(金興洛), 유지호(柳止鎬) 등이 창의하여 안동의진(安東義陣)이 결성되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허훈은 창의를 독려하는 안동의진의 창의장 권세연의 편지를 받았다. 이에 허훈은 진보에서 창의하였고, 그 아우 허위는 김산(金山)[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창의하였다.
허훈은 선산에서 진보 흥구로 돌아와 1896년 4월 7일 창의하였다. 진보의진의 창의장은 허훈이었고, 부장(副將)은 신상익(申相翼)이었다. 부장 신상익은 청송군 파천면 중평리 출신으로 진보향교(眞寶鄕校)에서 방산 허훈을 도와 창의하여 의병진의 업무와 전략을 주도하였다. 유학자였던 방산 허훈은 안동의진의 창의장 권세연의 독려로 의리를 앞세워 창의의 기치를 걸었지만 직접 전투를 수행할 능력은 없었다. 신상익은 허훈의 손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인 양반 유생으로 방산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1896년 3월 창의한 청송의진(靑松義陣)의 진중일기 『적원일기(赤猿日記)』에 의하면, 진보의진은 창의 이후 진보군의 어천(魚川)·남면(南面) 화마리(禾馬里) 등지로 진영을 옮기며, 안동·청송·영양·의성 등 주변 의병진과 사통(私通)을 교환하며 협조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청송의진의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 후 영양의진(英陽義陣)·청송의진과 힘을 합쳐 의성의진(義城義陣)을 응원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고, 안동의진의 배후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결과]
진보의진 해산 이후 허훈은 진보 흥구에서 아우 성산(性山) 허겸(許蒹), 왕산 허위와 함께 공부하며 은거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07년 방산 허훈은 아우 허겸과 허위에게 전답 3천여 두락[마지기]을 팔아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이 군자금은 허위가 1908년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허훈은 1907년 봄,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의 원장에 추대되었다. 1907년 8월 사망하였다.
[의의와 평가]
진보의진은 진보 흥구에 은거하고 있던 방산 허훈이 안동의진의 창의장 권세연의 독려로 결성한 의병진이었다. 진보의진은 결성 이후 주변 의병진과 협조 체제를 형성하고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