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1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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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眞寶鄕校 |
영어공식명칭 | Jinbo-Hyanggyo |
이칭/별칭 | 진성향교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신한2길 63[광덕리 221-1]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백지국 |
이전 시기/일시 | 1726년 - 진보향교 이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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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882년 - 진보향교 구읍(舊邑)으로 이건 |
이전 시기/일시 | 1886년 - 진보향교 현 소재지로 이건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665년 - 진보향교 대성전 현판 제작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98년 - 진보향교 명륜당 중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5년 10월 15일 - 진보향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1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진보향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
현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신한2길 63[광덕리 221-1] |
성격 | 향교 |
양식 | 겹처마 맞배지붕[대성전]||홑처마 맞배지붕[내삼문]|겹처마 팔작비붕[명륜당]|홑처마 맞배지붕[동·서재]|홑처마 맞배지붕[외삼문] |
정면 칸수 | 3칸[대성전]||3칸[내삼문]|5칸[명륜당]|3칸[동·서재]|3칸[외삼문] |
측면 칸수 | 3칸[대성전]||1칸[내삼문]|2칸[명륜당]|2칸[동·서재]|1칸[외삼문] |
소유자 | 경북향교재단 |
관리자 | 권세회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에 있는 조선시대 지방 국립 교육기관.
[개설]
진보향교(眞寶鄕校)는 조선시대 진보현(眞寶縣) 유생들이 머물며 수학한 교육의 공간이자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는 제향의 공간이었다. 향교를 출입한 집단은 진보현의 재지세력(在地勢力)이었다. 그들은 교육과 제사를 위해 향교를 출입하면서 향론을 형성하는 등 향촌 자치 기구로서 활용하였다.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진보향교를 가려면 청송군 진보면사무소 입구에서 직진하여 청송새마을금고 진보 지점에서 진안동2길을 따라 우회전한다. 약 130m 이동한 후 우회전하여 250m 직진하면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에서 영당로를 따라 좌회전한 뒤 230m 이동 후 오른쪽에 있는 광덕교를 건너면 ‘진보향교·송만정’ 표지판이 있다. 표지판을 따라 우회전하여 신한1길을 타고 약 150m 이동 후 갈림길에서 오른쪽 신한2길 방향으로 200m 이동한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100m 정도 직진하면 다시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 길로 100m 가다 보면 정면에 진보향교가 자리 잡고 있다.
[변천]
조선시대 편찬된 읍지 및 근현대 편찬된 군지 등에는 진보향교에 관한 기록이 확인되나, 이전 문헌들에서는 창건과 관련된 기록이 없어 그 시기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근래 창건 연대를 밝힌 문헌이 편찬되었는데, 1991년 간행된 『경북향교지』가 대표적이다. 이 책에는 “1440년(태종 4)에 건립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태종 4년은 1404년이고, 1440년은 세종 22년이므로 서기와 왕력 사이에 오기가 있다. 자료의 부족으로 1404년(태종 4)과 1440년(세종 22) 중 어느 것이 창건된 시기인지 확인할 수 없으며, 이후 출간된 자료들은 1404년 또는 1440년으로 창건 연대를 표기하고 있다. 이 밖에 창건 시기와 관련하여 고려 말에 비봉산에 시창(始創)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진보향교의 창건 시기는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향교가 수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 향교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창건 이후 진보향교는 여러 차례 이건되었으나, 이 역시 자료의 부족으로 시기와 횟수, 장소 등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이현일(李玄逸)[1627~1704]이 쓴 「진성향교이건상량문(眞城鄕校移建上梁文)」, 조덕린(趙德麟)[1658~1737]이 쓴 「진보향교이건상량문(眞寶鄕校移建上梁文)」을 통해 두 차례 이건 사실과 그 시기를 짐작해 볼 뿐이다.
명확하게 이건 시기가 기록된 것은 신익호(申翼浩)가 쓴 「향교명륜당중수기(鄕校明倫堂重修記)」로 1726년(영조 38)에 이건되었다고 한다. 한편, 향교의 위치를 기록한 자료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輿地圖書)』, 『진보현읍지(眞寶縣邑誌)』(1786) 등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현의 남쪽 4리, 『여지도서』는 관아의 동쪽 3리, 『진보현읍지』는 현의 북쪽 3리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건 장소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후 진보향교는 1882년(고종 18) 구읍(舊邑)으로 이건되었다가, 1886년(고종 23) 지금의 자리로 다시 이건되었다. 1896년 진보현이 청송군으로 합병되면서 진보향교는 청송군의 관할이 되었다. 1898년 유정헌(兪正憲)의 주도 하에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광복 이후 1976년 대성전 보수, 1983년 외삼문 보수, 1984년 대성전 보수, 1990년 서재 보수, 1992년 동재 중건, 1993년 교직사 보수, 1994년 재사(齋舍) 중수, 2003년 대성전·명륜당·내삼문 등 해체 보수, 2006년 서재 보수, 2007년 내삼문 보수 등 여러 차례 보수와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형태]
진보향교는 크게 제향 공간인 대성전(大成殿)·내삼문(內三門), 강학 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서재(西齋)·외삼문(外三門)으로 구분된다. 강학 공간이 전면에 배치되고, 제향 공간이 뒤에 자리 잡은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이다. 대성전은 전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현판 뒷면에 「상정사송사삼자숭정후초거을사(上丁賜頌賜三字崇禎後初去乙巳)」묵서명을 통해 현판이 1665년(현종 6)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도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삼문은 전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명륜당은 전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종도리장혀 하부에 ‘상지삼십오년무술팔월초팔일사시립주동월십삼일묘시상량(上之三十五年戊戌八月初八日巳時立柱同月十三日卯時上樑)’이란 상량문이 있다. 이것을 보면 1898년으로 추정된다. 「명륜당(明倫堂) 」현판과 「동재중건기(東齋重建記)」등 다수의 기문이 걸려 있다.
동재와 서재는 건물의 규모와 양식이 같다. 전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전면에 툇칸을 두었다. 외삼문은 전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부속 건물로는 교직사와 화장실 등이 있으며, 외삼문 전면 우측에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현황]
향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로 1896년 경상북도 진보군 진보향교 『체임록(遞任錄)』, 1902년 경상북도 진보군 진보향교 『체임록』, 1914년 경상북도 진보군 진보향교 『체임록』, 1914년부터 1933년까지 『유안(儒案)』 등의 고서가 있다.
1896년 경상북도 진보군 진보향교 『체임록』은 1836년부터 1902년까지 진보향교의 교임(校任)으로 활약했던 인사들의 명단과 교체 연월을 기록한 서책이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 향교 운영의 추이와 진보 지역의 재지사족(在地士族)의 동향을 살펴볼 수 있다.
1902년 경상북도 진보군 진보향교 『체임록』은 1902년부터 1909년까지 진보향교의 교임으로 활약했던 인사들의 명단과 교체 연월을 기록한 서책이다. 구한말 향교 운영의 추이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1914년 경상북도 진보군 진보향교 『체임록』 1914년부터 1971년까지 진보향교의 교임으로 활약했던 인사들의 명단과 교체 연월을 기록한 서책이다. 서문(序文)에는 일제의 통제를 받는 향교의 현실이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향교 운영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자료이다.
『유안』을 통해 조선시대 진보향교의 향교 유림의 형태를 추측할 수 있다. 국권 피탈 이후 일제에 의해 향교 재산 관리권이 빼앗긴 상태였다. 석전제(釋奠祭) 봉행 등 향교 운영을 위해 유안을 등재하는 것과 함께 기부금을 갹출하여 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 밖에 「명륜당」현판 및 각종 기문이 건물 내에 있다.
[의의와 평가]
진보향교는 건축학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다. 특히, 대성전의 경우 기둥과 전면 벽체 구성 수법에서 특이한 점을 살펴볼 수 있고, 내삼문의 경우 기둥 내부에는 보아지[梁奉][기둥머리 또는 주두에 끼워 보의 짜임새를 보강하는 짧은 부재]로 대량(大樑)[대들보]을 받게 하고, 파련대공[마룻보 위에 마루를 받쳐 세운 기둥의 하나로, 물결·구름·꽃 등 여러 문양을 새긴 대공을 말함]에 소로를 끼워 마루도리를 받게 하고 있는, 보기 드문 건축 형태이다.
진보향교의 소장 전적은 대부분 산실되었고, 남아 있는 책 중 『체임록』, 『유안』, 『향교유림안(鄕校儒林案)』 등은 이 지방의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체임록』의 경우 조선 후기부터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자료로서, 당시 진보 지역 재지세력을 이해하고 향교의 실태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