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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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鍾洛 |
영어공식명칭 | Seo Jongrak |
이칭/별칭 | 주일(周一),성호(城湖)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74년 10월 3일 - 서종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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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6년 3월 - 서종락 청송의진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3월 - 서종락 산남의진 청송 지역 소모 및 후봉장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4월 - 서종락 산남의진 선봉장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음력 8월 14일 - 서종락 신성전투 참전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2월 - 서종락 청송 동부진 대장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서종락 고와실전투 참전 |
몰년 시기/일시 | 1940년 07월 20일 - 서종락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0년 - 서종락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서종락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07년 9월 21일[음력 8월 14일] - 신성전투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0년 - 고와실전투 |
출생지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
활동지 | 청송의진 - 경상북도 청송군 |
활동지 | 산남의진 - 경상북도 영천시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청송 동부진 대장 |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장.
[개설]
서종락(徐鍾洛)[1874~1940]은 1906년 3월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되는 과정에서 청송 지역의 소모(召募)를 담당하였으며, 창의(倡義) 이후에는 1차 산남의진의 후봉장(後鋒將)에 이어 선봉장(先鋒將)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에는 청송 지역 유격대를 맡아 활동하였다. 특히 제3대 대장 최세윤(崔世允)이 지역 분대를 중심으로 한 유격전을 구상하자 청송 동부를 맡아서 불굴의 항전을 전개하였다.
[가계]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주일(周一), 호는 성호(城湖). 1874년 10월 3일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에서 아버지 서찬성(徐鑽成)과 어머니 함안조씨(咸安趙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종락은 조선 태종 때의 문신 달성군(達城君) 서진(徐晉)의 후예이다.
[활동 사항]
서종락은 1896년 3월 현동면 개일(開日)의 남석우(南錫祐)와 함께 청송의진(靑松義陣)에 참여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그 후 남석우와 함께 화적(火賊) 토벌에 참여하였다. 1906년 3월 산남의진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창의장(倡義將) 정용기(鄭鏞基)는 이한구(李韓久), 정순기(鄭純基), 손영각(孫永珏) 등과 함께 경상도 전역을 망라한 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때 청송 지역에 파견된 이한구의 권유로 서종락은 소모를 담당하였다. 그 후 서종락은 청송 지역 출신의 남석우, 남석인(南錫仁), 남석헌(南錫憲), 김태언(金泰彦), 조태초, 오상영(吳相泳), 이세기(李世紀) 등과 함께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후봉장에 추대되었다.
1906년 4월 창의장 정용기가 신광면(神光面) 우각동(牛角洞)에서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 참령(參領) 신석호(申錫鎬)의 간계에 속아 체포된 후, 중군장(中軍將) 이한구가 산남의진을 지휘하게되었다. 이한구는 부서를 개편하여 진용을 다시 짰는데, 이때 서종락은 선봉장에 추대되었다. 1907년 음력 4월 정용기가 재기하여 2차 산남의진의 진용을 재편성하자, 서종락은 청송 지역 유격대를 맡아 1907년 음력 8월 14일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에서 신성전투(薪城戰鬪)를 치렀다.
1907년 10월 7일 청하군(淸河郡) 죽장면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정용기가 전사한 뒤, 정용기의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이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정환직마저 1907년 12월 11일 죽장면 고천(高川)의 각전(角田)에서 생포되어 총살, 순국하였다. 이에 1908년 2월 5일 산남의진의 제3대 대장으로 취임한 최세윤은 북상 계획을 중단하고 지구전(持久戰)을 계획하여 24개 지역 79명으로 구성된 지역 활동 책임자를 선정하였다.
서종락은 청송 동부진(東部陣)를 지휘하며 주왕산(周王山)을 중심으로 청송읍과 부동면[현 주왕산면], 그리고 부남면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청송 서부진(西部陣)은 남석구(南錫球)가 지휘하며 철령(鐵嶺)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서종락 휘하에서 활동하던 청송 동부진, 일명 서종락부대는 중군(中軍) 우영조(禹永祚), 도총(都摠) 오상영(吳相泳), 참모장(參謀長) 심일지(沈一之), 소모장(召募將) 윤용식(尹龍植) 등으로 진용을 편성하였다. 그 외 남시철(南時喆), 박문선(朴文善), 남정철(南定喆), 조경옥(趙敬玉), 남석광(南錫光), 배상언(裵尙彦), 배연집(裵淵楫) 등이 서종락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7월 최세윤이 잠복하면서 산남의진은 그 구심력을 잃고 해체되기에 이르렀으나, 서종락 부대를 비롯한 일부 의병들은 청송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유격전으로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의병들은 1910년 경주·영천·의흥·청송을 관할하는 일본군 수비대 합동토벌대의 추격을 피해 청송군 안덕면 고와실(高臥室)로 들어갔다. 이때 서종락부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많은 사상자를 낸 채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였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체포된 의병들은 양손을 묶인 채 고와실 앞으로 흐르는 길안천(吉安川) 백석탄(白石灘)에서 총살되는 등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고와실전투(高臥室戰鬪)를 끝으로 산남의진의 지역 분대인 청송의진은 해산하였다. 당시 서종락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백석탄을 따라 물밑으로 30여 리를 도망하여 목숨을 건진 뒤 보현산(普賢山)에 은거하였다. 1940년 7월 20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