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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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洛山里 |
영어음역 | Naksan-ri(Waegwan-eup)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영복 |
개설 시기/일시 | 1914년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면 낙산리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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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949년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면 낙산리에서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로 개편 |
법정리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 |
성격 | 법정리 |
면적 | 7.7㎢ |
가구수 | 226가구 |
인구[남/여] | 457명[남 244명/여 213명]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금무산과 그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이름을 따서 낙산(洛山)이라 하였다. 자연 마을인 가실(佳實) 마을은 큰 호수가 있고 그 주위에 갈대가 많아 노곡(蘆谷) 또는 노호(蘆湖)로도 불렀다. 배태 마을은 낙동강 변에 위치한 마을로 일대에 소(沼)가 있고, 나룻배를 부리던 곳인 나루터가 있어 배터로도 불렀다. 또한 강안(江岸)으로 돌출된 산자락에 암벽이 있어 돌틈이라고도 하였다. 보병골[步兵谷] 마을은 임진왜란 때 일본인 보병들이 진을 친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또 마을 주변 산에 큰 나무들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하여 보병동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송골[步兵谷] 마을은 모양이 소쿠리 같다고 하여 소룡동이라 불렀고, 마을 주변이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을 입구에 약 500년 된 소나무가 있어 송곡이라고도 불렀다. 가마골[釜谷] 마을은 마을의 지형이 가마[釜]처럼 생긴 골짜기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신기(新基) 마을은 새로 터를 잡아 형성된 마을이라는 의미다.
[형성 및 변천]
『경산지(京山誌)』에 의하면 가실 마을은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거처하기 위해 선택한 곳으로 약 500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배태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알 수 없다. 보병골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어진 선비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 오고 있다. 송골 마을은 약 200년 전 단양 우씨(丹陽禹氏)가 옮겨 와 마을이 형성되었고, 그 후손들이 지금도 살고 있다. 가마골 마을은 약 200년 전 김해인(金海人) 김치세(金致世)가 청도 백곡(佰谷)에서 와 정착한 후 마을이 형성되었다. 신기 마을은 가마골 마을에 살던 주민들이 지금부터 약 70년 전 농토를 따라 새로 터를 잡고 형성한 마을이다.
낙산리[왜관읍]는 조선 시대에는 칠곡군 노곡면(蘆谷面)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부동·노호·강창·보병·추동(楸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칠곡군 왜관면에 편입하였고, 1949년 왜관면이 왜관읍으로 승격하였다. 6개 자연 마을이 3개 행정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낙산 1리에 가실[노곡, 노호] 마을·배태[배티, 배터, 돌틈, 석현(石峴), 선착장(船着場)] 마을, 낙산 2리에 보병골[보병동(寶屛洞)] 마을, 낙산 3리에 송골[소나무골, 소용동(沼龍洞)] 마을·가마골 마을·신기 마을 등이 있다.
[자연 환경]
낙산리는 왜관읍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6㎞ 지점에 위치한다. 동북에는 금무봉이 솟아 산줄기들이 동·남·북 3면으로 둘러싸고 있다. 서쪽에는 낙동강과 인접한 곳에 비옥한 갯밭이 형성되었으나 해마다 홍수로 인하여 침수 피해가 심해 1986년 제방을 축조하였다.
[현황]
2013년 12월 현재 낙산리의 면적은 7.7㎢이며, 인구는 226가구, 457명으로 남자가 244명, 여자가 213명이다. 왜관읍과 대구광역시를 잇는 4차선 국도가 지나가 대구 생활권에 속한다. 2003년 왜관 산업 2단지가 조성되면서 대부분의 농경지와 마을 일부가 편입되었다. 북쪽 경계 마을인 금남리에는 왜관 산업 1단지가 조성되었고, 남쪽 경계 마을에는 왜관 산업 3단지가 조성 중에 있어 농촌 마을의 형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마을 뒤 언덕에 1924년 건립된 고딕식 건축물인 가실 성당[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348호]이 우뚝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