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366 |
---|---|
한자 | 歸巖祠堂 |
영어의미역 | Gwiam Village School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62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태훈 |
성격 | 사당|가묘 |
---|---|
양식 | 장혀수장 |
건립시기/연도 | 18세기 경 |
정면칸수 | 3칸 |
측면칸수 | 1칸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625[귀암마을] |
소유자 | 이택기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이원정의 사당.
[개설]
광주(廣州) 출신의 귀암(歸巖) 이원정(李元楨)[1621~1680]은 자는 사징이며, 응교 이도장의 아들이다. 1648년(인조 26)에 진사에 입격한 후, 1652년(효종 3)에 증광시, 갑과의 방안으로 급제하여, 검열, 지평, 장령, 교리 등을 지내고, 1660년 장성 부사로 나아갔다가, 동년에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와 이듬해 동래 부사가 되었다. 이어 강릉 부사, 의주 부윤, 충청 감사, 광주 부윤 등을 지내고, 1670년(현종 11) 사은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양주 목사를 거쳐 도승지에 오르고, 그 후 공조 및 병조, 예조, 호조, 형조의 참판, 대사간, 대사헌, 대사성 등을 두루 역임했다. 1678년(숙종 4) 형조판서 재임시에는 영남에 대동법을 창설한 치적이 있어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1680년(숙종 6) 이조 판서 재임 시에 모함을 받아 경신옥사로 평안도의 초산에 귀양 갔다가 곧 피화를 당하였다. 뒤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익이다. 왜관읍 석전리에 채재공이 지은 신도비가 있고, 저서로는 『경산지』2권과, 『귀암문집』 12권이 전한다.
[건립 경위]
귀암은 향년 59세로 화를 입어 죽은 후 문중에서 불천위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안채 뒤 쪽에 별묘를 세우고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사후인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한 번 중수를 한 바 있다고 하며, 근래 약 15년 전에는 번와와 단청을 새로이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치]
왜관읍 석전리 귀암 마을에 있으며 최근 건립한 이스트빌 아파트 남쪽에 위치하는 귀암 고택 내에 있다.
[형태]
평평하고 넓은 대지에 방형으로 토석담을 두른 귀암공 종택 내 북서편에 별도의 담을 치고 사당이 남향으로 앉아 있다. 사당 앞으로는 ㄱ자형의 안채와 일자형 사랑채 그리고 연이어 중문간채가 있으며 그 아래로 문간채가 귀암공 종택의 일곽을 이루고 있다. 고택 서편에는 농암 이상섭의 작은댁이 있고 그 뒤 귀암 사당 서편에는 농암정사가 위치한다.
사주문 형식의 신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촐한 맞배집으로 구성한 사당이 있다. 전면 각 칸에 심벽을 치고 쌍여닫이 당판문을 설치했다. 구조는 외벌대 낮은 기단 위에 투박한 덤벙주초를 앉히고 듬직한 원주를 세워 3량가의 상부 구조를 받고 있다. 주상부는 아무런 꾸밈 없이 장혀만 결구한 장혀수장으로 처리했다. 도리는 모두 굴도리로 처리하였고, 측면의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았는데 도리머리가 보이게 했다.
풍판은 밑면 양단을 사절한 모양이다. 지붕은 겹처마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용마루와 내림마루에는 망와로 장식하고 박공면에는 너새로 장식했다. 처마에도 내림새와 막새로 마감했는데 특히 막새는 사찰에서 쓰였던 연화문 수막새를 재사용했다. 초석 위에 기둥 밑면에 맞추어 문 하방을 낮춘 것은 사당건축에서 자주 쓰이는 기법으로 볼 수 있다. 사당은 전체를 가칠단청과 금단청으로 곱게 단장했다. 부재는 초석과 기둥은 오래되어 세월의 깊이를 느낄 수 있으며 다른 부재는 일부 교체가 되었던 것 같다.
[현황]
현재 사당 출입부는 보도를 포장하고 화단을 조성하여 특히 다른 곳보다 화려하게 장식했다.
[의의와 평가]
귀암 사당은 이원정의 사후인 17세기 말경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한 번 중수 한 바 있지만 기둥과 초석 등은 변하지 않은 채 옛 모습 그대로 인 것으로 보인다. 꾸준한 관리와 보존대책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