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384 |
---|---|
한자 | -聖地 |
영어의미역 | Holy Place in Heukdarigol Village |
분야 | 종교/기독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학명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영복 |
성격 | 천주교 박해시대 순교지 |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학명리 |
소유자 | 천주교 대구대교구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학명리에 있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때 순교자들을 처형하던 장소.
[개설]
천주교 전례는 봉건적 유교 도덕과 사회규범에 대항하는 사상적 반항, 이념적 도전이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기본질서를 부인하는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를 하였으며 흙다리골 성지는 신자들을 처형하던 장소이다. 1869년 조선 천주교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조정의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한티에서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 도중 흙다리골에서 참수하였다.
[변천]
1866년 병인박해를 만나고 1868년에 이어 박해가 계속 되던 해인 1869년에 충청도와 경상도 북부 지방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주하여 신자촌을 이룬 한티마을에 포졸들이 급습하여 신나무골 신자촌에 살다가 이곳으로 피신하고 있던 이선이[엘리사벳]와 당시 16세이던 장남 배도령[스테파노]를 비롯한 40여명을 현장에서 참수시키고, 나머지 여러 신자들을 서울로 압송하던 도중 걸음걸이가 불편한 신자들을 흙다리골 성지에서 처형하면서 시신을 버리고 갔다. 그 후 살아남은 신자들이 시신들을 묻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위치]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학명리에 있는 흙다리골은 대구~안동 간 국도를 따라 다부리 쪽으로 가다 보면, 다부재가 시작되기 직전에 위치하고 있다. 국도 아래로 다리가 있고, 계곡의 물이 도로 아래 흙다리 밑으로 흘러 동명천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1930년생인 김영환 몬시시뇰이 중학교 1학년일 때 부친 김상교[방지거]에게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충청도 보은에 살던 고조부 김희규[요한, 1804~1887]가 천주교 신자들의 박해를 피해 경상북도 군위군 용대에 이주하여 살다가 다시 박해가 계속되자. 칠곡 한티로 야간도주해서 살던 시기에 있었던 사건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김영환으로부터 흙다리골에 순교자들이 묻힌 사실을 전해 듣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대구대교구(大邱大敎區)에서는 계속 그 흔적을 찾고 있는 중이다.
[현황]
정확한 흔적은 찾지 못하고 전해오는 이야기가 확인할 뿐이다.
[의의와 평가]
사적지의 보존과 신자들의 재교육의 장(場)이 되고, 천주교 신자가 순례행사로 순교 정신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