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4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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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聖地 |
영어의미역 | Holy Place in Hanti Village |
분야 | 종교/기독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영복 |
성격 | 천주교 박해 때 순교성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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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한티로1길 69[득명리 5] |
소유자 | 천주교 대구대교구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있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모인 신자촌.
[개설]
천주교 전례는 봉건적 유교 도덕과 사회규범에 대항하는 사상적 반항이며, 이념적 도전이어서 수차례 박해가 있었다. 한티 성지는 조정으로부터의 박해를 피해 한티마을에 모인 수십 명의 신자들이 무더기로 처형된 비극의 현장으로 현재 군데군데 신자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 한티마을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인근의 신나무골과 비슷한 때인 1815년 을해(乙亥)박해와 1827년 정해(丁亥)박해 후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마을에 와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1837년 서울에서 낙향한 김현상[요아킴] 가정이 신나무골을 거쳐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를 피해 한티마을로 이주해 오면서부터 신도들이 모여들어 본격적인 교우촌을 형성하고, 옹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며 생계를 이어갔다. 움막집에 살던 신도들은 신나무골 공소와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신앙생활을 하였고, 1845년에 조선에 입국한 다블뤼 주교와 1849년에 입국한 최양업 신부가 경상도를 순회·전교하면서 한티마을에 와서 판공성사를 집전하였다.
1860년 경신박해로 뿔뿔이 흩어진 신자들은 박해가 뜸하자 다시 모여들어 오히려 더 큰 규모가 되었다. 그리하여 1862년 배르뇌 주교의 성무 집행 보고서에는 “칠곡 마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차례의 박해를 간신히 넘긴 한티마을은 마침내 1866년 병인년의 대박해로 ‘최후의 날’을 맞는다. 1868년까지 3년간 유례없이 혹독하게 이루어진 병인박해는 평화롭던 마을을 순식간에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고 수십 명의 신자들이 한자리에서 몰살을 당하는 비극을 남겼다. 당시 순교자로는 배정모[손아]의 부인 이선이[엘리사벳] 외 배도령, 서익순과 서태순, 조가를로 등이 있으며, 병인박해를 전후해 순교한 30여 기의 무명 순교자 무덤이 산재해 있다.
[위치]
성지는 칠곡군 동명면 한티로1길 69[등명리 5번지]에 있다. 대구 시내에서 국도 5호선을 따라 군위 방면으로 북상하다가 동명저수지 쪽으로 우회전하면 한티를 넘는 지방도 908호선이 된다. 여기서 11㎞쯤 올라가면 한티 정상 못 미쳐 우측으로 ‘한티 순교 성지’ 비석 표시가 보인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신자들이 떠나면서 점차 기억에서 잊혀 지던 한티는 1961년 당시 칠곡 본당의 전교회장 마백락[글레멘스]가 칠곡 본당 관할 공소였던 한티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 한티마을에서 출생하고 생활하던 사람들을 찾아가 증언을 수집하고, 순교자들의 묘지를 확인하였다. 1967년에 박병원[빌립보] 신부, 이문희[바오로 훗날 대주교 대구교구장] 신부, 경북대학교 김달호 교수의 주관으로 대구대교구의 신자들이 이선이 묘소와 한티를 도보로 순례하였다. 1980년대 초 대구대교구가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성지 개발 계획을 수립하면서 한티는 본격적으로 천주교 성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1983년 5월에 동명 본당은 한티 인근에 자리 잡은 이기수 몬시뇰의 사저를 인수하고, 대구대교구의 지원을 받아 새롭게 단장하여 한티 순례자의 집으로 개원하였다. 1983년 7월에 왜관본당 서상우[요한] 신부와 신동본당 마백락 회장이 문중 족보와 순교자의 후손의 증언을 통해서 서태순이 한티에 묻혀 있음을 알아냈고, 9월에는 마백락 회장이 조가롤로와 최바르바라, '조아기'[본명 미상]의 묘를 확인하였다. 1988년 4월에 효성여자대학교 박물관[현 대구가톨릭 대학교]에서는 한티 성지 조사단을 결성하여 도자기 요지와 숯가마 터를 발굴하였고, 순교자 묘소, 공소 건물지 등을 실측하였다. 조사를 통해 한티에 거주하던 천주교 신자들의 생활상을 규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마백락 회장과 한티 마지막 공소회장이었던 김태현, 김복현 형제 등의 증언과 현장 답사로 순교자 묘 19기를 확인하였다. 이에 대구대교구는 한티 사적지의 보존과 무명 순교자의 묘 발굴을 위하여 ‘한티 사적지 무명 순교자 분묘 이장위원회’를 구성하고, 5월 24일에 순교자 묘 발굴 작업을 진행하였다. 당시 19기 중 6기를 발굴, 3기는 성지 묘역 안으로 이장하였으며, 새롭게 묘 5기도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 피정의 집의 완공 개관을 앞둔 1991년 10월에 순교자 묘 9기가 새로이 확인되었다.
[현황]
한티성지에는 피정의 집과 영성관, 순례의 집이 있다. 피정의 집은 1991년 10월에 신자들의 영성생활을 위한 건물로 지어졌으며, 영성관은 2000년에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입생들이 1년간 공동생활을 할 집으로 지어졌다. 순례의 집은 2004년 12월에 성지를 찾은 순례객들이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건물로 지어졌다.
[의의와 평가]
순교자 묘지 정리와 사적지의 보존과 피정의 집, 영성관, 순례의 집등을 신축하여 신학생과 신자들의 재교육의 장이 되었고, 순례객들이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시설이 완공되었으며, 연중 천주교 신자들의 순례행사로 순교 정신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