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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천주교의 시원지 신나무골과 한티 성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1907
한자 嶺南天主敎-始原地-聖地
영어의미역 Fountainhead Sinnamugol Village and Hanti Holy Place of Yeongnam Roman Catholicism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동명면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마백락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지천면 일대에서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모인 신자촌.

[개설]

칠곡 지역의 신나무골[지천면 연화리]과 한티[동명면 득명리]와 성지골[동명면 송산리]에는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일월 산중의 우련전과 곧은정에 살던 신자들이 배교자의 밀고로 33명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와서 다시 문초를 받고 감옥에 갇혔을 때 신자들의 가족들이 옥바라지를 위해서 대구와 가까웠던 신나무골한티, 성지골 등에 피난해 있으면서 순교자들을 돌보아주었다.

[칠곡의 천주교 복음전파 과정]

신나무골한티 성지가 있는 칠곡군은 경상북도 남서부에 위치하며 대구광역시와는 남쪽으로 접해 있다. 그런데 1592년 임진왜란 전에는 경주와 상주에 있던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에 잠시 칠곡 팔거현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대구 달성으로 옮겨갔고 이어서 임진왜란 이후 1601년에 대구에 완전히 정착하여 경상감영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칠곡 지방은 경상도 수부(首部)인 대구와 바로 접하게 되었다.

한편 칠곡 지방에는 조선시대에 실학파의 원류인 한강 정구 선생의 제자인 이윤우를 비롯한 이원정, 이담명 등 실학적인 선비와 관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실학적인 경향을 띤 선비 중에서 1784년 한국천주교 창립 시에 천주교 진리를 받아들여 천주교인이 된 것으로 전해지는 사람은 성안의의 후손인 성섭 가문이라고 전한다. 성섭은 당시 칠곡 왜관 달오에 살면서 몇 번 과거에 낙방한 후에는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마침내 천주교 진리를 받아들여서 천주교 신자 가정이 되었다고 한다. 성섭은 1788년에 세상을 떠나고 1791년 신해박해와 1801년 신유박해 때 성섭의 후손 중 일부는 성주 홈실로 피난을 갔고 일부는 그대로 칠곡 가실[낙산]에 남아서 은밀하게 천주교를 계속 믿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의 증손자인 성순교는 경신박해 때[1859~1860] 상주 청리로 피난을 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서산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한편 칠곡 신나무골한티와 성지골에는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일월 산중의 우련전과 곧은정에 살던 신자들이 배교자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33명이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와서 다시 문초를 받고 감옥에 갇혔을 때 신자들의 가족들이 옥바라지를 위해서 대구와 가까운 거리인 신나무골한티, 성지골 등에 피난해 있으면서 순교자들을 돌보아주었다. 이렇게 해서 1836년부터 조선에 와서 선교 활동을 하던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전국을 순회 전교할 때 한반도 남쪽 지방을 맡은 샤스땅 신부가 신나무골, 한티 등 신자촌을 순회하면서 성사를 집전하고 미사를 봉헌했었다.

[신나무골 성지]

현재의 칠곡군 지천면 연화 2리에 위치한 신나무골소학산 줄기인 용솟음 자락에 북신처럼 싸인 아늑한 한촌이었다.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일월 산중의 우련전과 곧은정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오면서부터이다. 당시 가족들과 신자들이 대구와는 하루거리로 가까우면서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인 신나무골에 와서 경상감영에서 문초를 받고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신나무골의 첫 신자는 김해김씨(金海金氏)라고 하는데, 순교자 김종한 안드레아의 가정이라고 한다. 그 후 김종한의 가정은 충청도 고향쪽으로 이사를 갔다고 전한다. 한편 이때 부근의 하빈 낙골에 살던 이재건 요셉의 모자가 신나무골 신자들에게 천주교 진리를 배워서 세례를 받았으나 문중의 박해로 대구의 새방골로 갔다가 민묵골에 안착했다.

그 후 1827년 정해박해 때도 상주와 안동, 봉화 등지에 살던 신자들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와서 문초를 받고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가족들이나 신자들이 신나무골에 피난 와서 살면서 감옥에 갇힌 신자들을 돌보았다고 전한다. 그 후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나와서 포교 활동을 할 때 한반도 남쪽 지방을 맡은 샤스땅 신부가 순회 전교를 하였는데 충청도가 고향인 순교자 홍병주, 홍영주 형제를 데리고 와서 이곳 지역 회장으로 임명하고 대구와 부근의 신자들을 돌보게 하였다. 이때 샤스땅 신부가 나무 밑에 움막을 짓고 이곳에서 얼마간 살면서 전교 활동을 하였는데, ‘신부님이 나무 밑에서 움막을 짓고 피난을 했다’고 하여 신나무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전한다.

그리고 1837년에 서울에 살던 김해김씨 김현상 요아킴 가정이 낙향해서 신나무골로 피난을 왔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를 만나서 그의 가문은 다시 칠곡 지방의 더 깊은 산골인 한티 신자촌으로 피난을 갔으며 그 후 1850년경에는 대구 읍내 가까운 새방골로 이사를 갔었다. 그 후 신나무골에는 최양업 신부, 다블뤼 주교, 리텔 주교 등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이 경상도와 남쪽 지방을 순회 전교하면서 신나무골에 와서 판공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했다. 이렇게 해서 신나무골은 당시 경상도의 수부(首部)인 대구를 선교하기 위한 신앙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다. 그 후 1860년 경신박해 때는 인근의 칠곡 읍내에 살던 배정모 가정이 신나무골로 피난을 왔다가 얼마 후에 신나무골에도 포졸들이 들이 닥치자 다시 가족 다섯 명이 한티로 피신을 갔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신나무골과 대구 인근의 신자들이 모두 더 깊은 산골인 한티로 피난을 갔었다가 1868년 무진년에 그곳에서 37명 이상이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한편 병인박해[1866~1873] 후 다시 프랑스 선교사들이 1876년부터 조선에 나와서 포교 활동을 할 때 1877년에 조선에 입국한 로베르 김보록 신부가 처음에는 경기도와 강원도 등지로 포교 활동을 하다가 1882년 말부터 경상도와 충청도 일부, 전라도 일부를 맡아서 순회 전교를 하였으며 마침내 1886년 한불수호조약 직전인 1885년 12월 신나무골에 정착하였다. 그러자 당시 대구의 유력한 신자인 서상돈 아오구스띠노는 김 신부를 적극적으로 돕는 한편 김 신부의 사촌 여동생이며 순교자 서태순 베드로의 외동딸인 서 마리아를 신나무골에 보내어 김 신부를 적극 돕게 했다. 그리고 로베르 김 신부는 1883년에 신나무골에 신학문과 구학문을 가르치는 연화학당을 설립했다. 이것이 서울의 한한학교와 함께 한국 최초의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당이다.

그 후 1887년 한불수호조약이 비준·공포되어 신앙의 자유가 한층 나아지자 김보록 신부는 대구의 포교 활동을 위해서 대구의 새방골로 가고, 1887년 말에는 보드네 윤 사베리오 신부가 신나무골에 와서 20개월 있으면서 경상도 북부 지방과 전라도 일부 지방을 맡아 포교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1889년 3월에 전라도 전주 지방의 선교를 위해서 전주 부근의 대성동으로 떠났었다. 그러자 이어서 조득하 신부가 1889년부터 1890년까지 12개월 동안 신나무골에서 조선말과 풍습을 배우는 한편 선교 활동을 하다가 1890년에 경상남도 지방의 선교를 책임 맡아서 부산의 영도섬 조내기[청학동 성당]로 갔다. 또한 이어서 1894년에는 빠이아스 하경조 신부가 신나무골에서 동학난 동안 계시다가 동학난이 끝나자 먹을 물이 부족한 신나무골을 떠나 가실로 가서 집과 전답을 구입하여 수리하고 1895년 2월 인근의 왜관 가실로 가서 그해 9월에 가실성당을 설립하였다.

이와 같이 신나무골은 박해시대 때는 신자들이 피난 와서 살았던 신자촌이며 병인박해 후에는 대구와 경상도 지방을 맡아서 선교 활동을 하던 김보록 신부를 비롯한 역대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포교 활동을 했던 영호남 지방의 선교 요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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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 신나무골 천주교 교세통계표

신나무골은 1973년부터 성지 개발 사업이 추진되었는데 1977년 7월에 제1차 성역화 사업이 완수되면서 ‘대구 천주교 요람지’라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어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이하여 1860년 신나무골에 살다가 한티에서 순교한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하였고, 아울러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과 흉상, 신나무골 학당, 전시관 등을 건립하여 대구 본당의 첫 본당 터로 복원하였다. 현재 신동 본당에서 신나무골을 개발·관리하고 있다.

[한티 성지]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 한티마을에 위치하는 성지이다. ‘한티’란 말은 높은 재[嶺] 밑에 있는 한 곳에 모여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한티 성지는 옛날부터 대구 읍내에서 60리[24㎞]정도 떨어진 팔공산[1,151m]과 가산[902m] 사이에 있는 해발 600m 이상의 높은 산중의 마을이다.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아마 1815년 을해박해 때로 보인다. 당시 신나무골과 마찬가지로 청송, 진보, 영양 등지의 신자들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었을 때 문초를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자 가족들이 옥바라지를 위해서 대구와 하루거리[60리]로 가까운 이곳에 피난 와서 살게 되어 신자촌이 되었다. 또한 한티에는 고려 말부터 사기그릇을 구웠던 사기 가마터가 있어서 산중으로 피난 온 신자들이 나무를 베고 화전(火田)을 이루거나 사기를 구워 팔아서 생계를 유지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옛날 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은 깊은 산중으로 피난을 가서 옹기 가마터를 설치하여 그릇을 만들었다. 그리고 행상을 하며 사방으로 팔러 다녔는데 이는 생계를 유지할 뿐 아니라, 신자들끼리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박해의 소식과 함께 박해 때 서로 헤어졌던 신자들을 다시 찾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 그러므로 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이 피난 가서 살았던 곳에는 거의 모두 옹기 가마터가 있다. 그리고 옹기굴에는 많은 신자들이 일을 하였다. 한티 성지도 그런 조건 때문에 일찍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피난 와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해서 처음 신자촌이 형성된 후에 기해박해 두 해 전인 1837년에 서울에 살던 김현상 요아킴 가정이 처음에 신나무골로 피난을 왔다가 1839년 기해박해로 다시 부근의 더 깊은 신자촌인 한티로 피난을 왔었다. 그러다가 1850년경 철종 때에는 박해가 거의 없었으므로 대구 인근의 새방골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신나무골에서 피난하고 있던 칠곡 읍내 사람인 배손이 가정은 급히 이곳 한티로 피신을 왔다. 그리고 사기굴에 숨어있었으나 뒤쫓아 온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굴 밖으로 끌려나와 문초를 받게 된다. 이 때 장부는 배교하였지만, 부인 이선이 엘레사벳과 장남 배스테파노는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하고 신앙을 고백하며 1860년 음력 2월 8일, 아직도 추운 이른 봄에 웃옷을 벗기고 나무에 매달아서 육모 방망이로 가슴과 턱을 치자 혀가 빠졌다. 그러나 끝까지 항복하지 않으므로 포졸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 가고 없는 빈집에서 작두를 가져와서 모자는 목이 잘려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포졸들이 돌아간 뒤에 장부는 모자의 시신을 한티의 동쪽 등에 임시 매장을 했다가 후에 부인 이선이 엘리사벳의 시신을 칠곡 읍내 아양동 선산으로 이장을 했다. 그 후 1984년 한국 선교 200주년 때 교회에서는 다시 연고 성지인 신나무골 성지로 이장을 했다.

한편 1862년경에는 다시 상주가 고향인 조 까롤로 가정이 문중박해에 의해서 황간, 상촌 등지로 피난을 다니다가 이곳 한티로 피난을 왔다. 움막을 짓고 살면서 당시 사방에서 피난 온 신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주일 첨례를 봄으로써 공소가 되었다. 그 후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서 신나무골과 대구 부근의 모든 신자들이 한티로 피난을 가서 많은 신자들이 몇 년 동안 안전하게 피난하였다. 그러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1868년 병인 3차 박해 때 갑자기 나라의 명령을 받은 가산산성의 병사들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합세하여 한티 신자들을 체포하여 현장에서 한꺼번에 37명 이상의 신자들이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이때 신자 회장인 조 까롤로 회장과 부인 최 발바라가 맨 처음에 치명을 하고 이어서 어린 여동생인 ‘조 아기’[본명 미상]가 스스로 자청하여 나아가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포졸들이 날이 저물어 물러간 뒤에 사방으로 흩어졌던 조 까롤로 회장 아들 조영학, 조영구와 신자들이 다시 모여 들어서 2~3일 동안 시신을 그 자리에 묻었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현재 한티 성지에는 37기의 작은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다. 또한 서울 포졸들에게 잡혀가던 신자들은 대부분 서울로 가는 큰 대로인 학명동의 흑다리걸에서 치명을 했다고 전한다.

한편 서익순 요한과 이공사가 등은 1867년 잠시 박해가 잠잠해지자 대구 집으로 돌아가던 중 서울 포교에게 잡혀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이렇게 해서 다시 신자들은 병인박해[1866~1873]가 끝나고 1886년에 한불수호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완전히 성취될 때까지 모여 살았다. 그 후 1877년부터 다시 조선에 나와서 전교 활동을 하던 로베르 김보록 신부가 1882년 말부터 경상도 지방과 충청도 일부, 전라도 일부 지방을 순회 전교하면서 한티에 와서 성사를 주고 미사성제를 봉헌했다. 당시 신자 수는 38명이었고, 판공성사를 본 신자는 20명이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신자들이 만주와 일본 등지로 이사를 감으로써 급격히 신자 수가 적어지고 1960년 초에는 겨우 두 가정만 남아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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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 한티 천주교 교세통세표

1886년 한불수호조약 이후 박해가 완전히 끝나고 1910년경부터 신자들이 만주와 일본 등지로 떠나면서 급격히 신자 수가 줄어든 한티 공소는 1961년 당시 칠곡 본당의 전교 회장이었던 마백락[글레멘스]이 조사를 진행하면서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칠곡 본당의 관할 공소였던 한티에 관심을 갖고 있던 마백락은 그곳에서 출생하고 생활하던 사람들을 찾아가 증언을 수집하고, 순교자들의 묘지를 확인하였다. 이처럼 순교자의 묘소가 확인되면서 1967년 9월에는 박병원 필립보 신부, 이문희 바오로 신부[후에 대구 대교구장 주교], 경북대학교 김달호 교수의 주관으로 대구대교구의 신자들이 신나무골, 칠곡 안양동에 묻혀 있던 이선이 묘소와 한티를 도보로 순례하였다. 그리고 1968년 9월에 병인 순교자 시복 경축 행사로 대구대교구의 신자들이 한티를 순례한 이후 매년 9월에 순례 행사가 계속되었다.

이와 같이 연례적인 순례 행사가 열리고,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방문하는 순례객들을 맞이하던 한티는 1980년대 초반 대구대교구가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성지 개발 계획을 수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천주교 성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1983년 5월에 동명 본당한티 인근에 자리 잡은 이기수 야고보 몬시뇰의 사저[동명면 기성동 소재]를 인수하고, 대구대교구의 지원을 받아 새롭게 단장하여 한티 순례자의 집으로 개원하였다. 이어 1986년 11월에 대구대교구는 한티 지역 20만 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1차로 피정의 집을 건립하고, 연차적으로 1천 평의 피정 시설을 마련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한티 성지 조성 사업이 진척되는 가운데 순교자의 묘소 조사 및 성지 발굴 작업도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문중 족보와 순교자의 후손의 증언을 통해서 서태순이 한티에 묻혀 있음을 알아냈고, 9월에는 조 까롤로와 최 바르바라, 조 아기의 묘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1988년 4~5월에 효성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는 한티 성지 조사단을 결성하여 자기 요지와 숯가마 터를 발굴하였고, 자연환경을 조성하고, 순교자 묘소와 지형을 측량하였으며 공소 건물지 등을 실측하였는데 이를 통해 한티에 거주하던 천주교 신자들의 생활상을 규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같은 해 5월 마백락과 한티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김태현과 김복현 형제 등은 증언과 현장 답사를 통해 무명 순교자의 묘 19기를 확인하고 이를 대구대교구에 보고하였다. 이에 대구대교구는 한티 사적지의 보존과 무명 순교자의 묘 발굴을 위하여 ‘한티 사적지 무명 순교자 분묘 이장위원회’를 구성하고, 5월 24일에 순교자 묘 발굴 작업을 진행하였다. 분묘 이장위원회는 19기 중 6기를 발굴하고 그 가운데 3기를 성지 묘역 안으로 이장하였으며, 발굴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무명 순교자의 묘 5기도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

1991년 10월에는 지상 5층, 지하 2층 규모의 한티 피정의 집이 완공되었는데, 개관에 앞서 증언 등을 통해 무명 순교자의 묘 9기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이어 1997년 10월에는 대구대교구 신학생들의 영성 수련을 위한 공간인 한티 영성관이 착공되어 2000년 2월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영성관은 지하 5층, 지상 2층 규모의 건물로, 2000학년도 신입생부터 1년간 공동생활을 하면서 신학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2004년 12월에는 성지를 찾은 순례자들이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장소인 ‘순례의 집’의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이 모든 성지 조성 사업은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바오로 대주교의 적극적인 의지와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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