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5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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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梅里立石 |
영어의미역 | Menhir in Sinmae-ri |
이칭/별칭 | 신매리 입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 신매리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길경택 |
성격 | 선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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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연도 | 청동기시대 |
높이 | 214㎝[1호 선돌]|175㎝[2호 선돌] |
소재지 주소 |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47-5[중앙탑길 112-28] |
소유자 | 충주시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 신매리에 있던 청동기시대 선돌.
[개설]
선돌[立石, Menhir]은 고인돌과 더불어 청동기시대에 발달한 거석(巨石) 문화의 상징물이다. 고인돌과 짝을 이루어 무덤의 표지와 같은 구실을 하는 것, 마을 어귀나 중심부에 세워져 마을 수호신의 역할을 하거나 이정표의 역할을 하는 것 등 그 역할이 다양하며 숭배의 대상이 된다.
선돌은 보통 남녀 쌍을 이루어 조성된다. 남성 선돌의 경우 할아버지 선돌, 남편 선돌, 오라비 선돌로 불리며, 여성 선돌의 경우 할머니 선돌, 본처 선돌, 누이 선돌, 시앗 선돌 등으로 불린다. 남성 선돌은 끝이 비교적 뾰족하며, 여성 선돌은 끝이 뭉툭하게 표현된다.
[위치]
살미면 신매리에는 모두 3기의 선돌이 있었다. 1기는 충주·단양·청풍을 잇는 국도 36호선 도로변 선돌백이마을에 거주하는 이재황(李在璜)의 집 대문 옆 담의 일부로 쓰이고 있었다. 다른 1기는 이곳에서 거의 서쪽으로 1.5㎞ 떨어진 매남마을 이관선(李寬善)의 밭 언저리에 있었다. 또 다른 1기는 여기에서 1㎞ 정도 더 떨어진 대문산 언덕에 위치하여 매남마을 선돌을 중심으로 일직선을 이루고 있었다.
3기의 선돌 가운데 선돌배기마을과 매남마을의 선돌은 1983년 충주댐 수몰 지역 문화 유적 조사의 일환으로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조사 후 수몰선 위인 살미면 내사동과 신매리의 경계 지점인 국도변에 복원되었으나, 1994년 충주박물관(구 중원향토민속자료전시관)이 건립되어 그곳으로 옮겨졌다.
[형태]
매남마을 선돌은 높이 140㎝, 폭 53㎝, 두께 약 50㎝로 비록 크기는 작고 부정형이기는 하나 남편 선돌로 불리고 있으며, 남자 성기와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대문산에 있는 선돌을 본처 선돌이라 하고, 선돌백이마을에 미끈하게 세워진 선돌을 후처 선돌이라고 하는 것도 이유가 있는 듯하다.
선돌백이마을의 후처 선돌은 1호 선돌로 일제강점기에 이미 한 번 넘어졌던 것을 다시 세운 것이다. 노출된 크기는 높이 214㎝, 최대 폭 110㎝, 두께 62㎝이며, 암질은 석영반암이다. 전체 높이는 지표 위에서 확인된 214㎝에 발굴에서 확인된 길이를 더한다면 최소한 4m는 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나 정확한 측정치가 없다. 선돌의 횡단면은 약간 일그러진 평행사변형이다.
매남마을의 남편 선돌은 2호 선돌로 조사 당시 약 40° 정도 언덕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언덕 위쪽으로부터 연결되는 바위 바닥 위에 선돌의 밑 부분을 놓고 지름 20㎝ 정도의 돌 3~4개를 받치고 세운 것으로 보인다. 전체 높이는 175㎝이고, 아랫부분의 폭은 35㎝이며, 암질은 편마암이다. 2호 선돌을 발굴하면서 구덩 내에서 삼국시대에 속하는 손잡이 부분 1점과 그릇 바닥 부분 1점이 출토되었으나, 이는 선돌의 조성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선돌은 민족의 애환이 서린 문화재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신매리 선돌은 현재 3기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지 않으나, 남편 선돌과 후처 선돌이 함께 한 자리에 놓여 있어 그 의미를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