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7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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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明成皇后遺墟址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 515-2[신흥3길 13]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손태진 |
성격 | 유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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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1900년(대한제국 고종 4) |
소재지 주소 |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 515-2[신흥3길 13] |
소유자 | 최중우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에 있는 조선 말기 명성황후 피난지.
[개설]
1882년(고종 19) 6월 9일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명성황후는 서울을 탈출하여 고향인 여주의 민위영 집에 숨었다가,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향제를 거쳐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을 찾아가던 중 자취를 감추기 위해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 국망산 밑 신흥동 이시영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시영은 이시일(李時鎰)[1818~1900]의 잘못된 기록으로 보이며, 어머니를 모시고 초가집에 가난하게 살며 나무를 팔던 총각으로 명성황후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50여 일간의 피난 생활을 마치고 환궁한 후 그 은공으로 음성군수가 되어, 마을에서는 그의 집을 ‘이음성 집’이라고 불렀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는 행궁과 비석 건립을 위한 상소가 기록되어 있으며, 가신리 신흥생활관 앞 담장 밑에는 격식과 형식을 갖춘 화강암 지대석과 주초석 등이 흩어져 있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변천]
명성황후가 피난했던 이시영의 집은 3칸 초가로 추정된다. 후에 이를 바탕으로 ㄱ형 집을 지었으며, 현재는 기단만 남아 있다. 행궁을 지으려 했던 터는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 515-2번지[신흥3길 13] 일대의 공터로 추정된다.
[위치]
명성황후 피난지인 이시영의 집 터는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 558번지[신흥2길 20, 지적도상의 대지 512-1]에 있다. 노은면 소재지인 연하리에서 지방도 520호선을 따라 서쪽으로 3㎞ 지점에서 가신3리로 들어가 500m 정도 가면 나온다.
[현황]
피난지는 기록과 기단으로 보아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一형 민가 형식의 초가로 추정된다. 행궁 터에는 480㎜×480㎜×180㎜ 정도의 방형 대석 위에 지름 약 350㎜의 원형 주좌 2개, 350~360㎜×350~360㎜×260~480㎜ 정도의 방형 초석 4개, 지대석 2개가 있다.
그 밖에 마을에도 화강암 초석과 지대석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큰 규모의 건물을 조성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0년 노은면 우성리에 살던 김하석의 단자를 통해, 행궁을 건립하려고 초석과 목재 등을 마련하다가 동학농민운동으로 중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가 신변의 안전을 위해 피신하였던 피난지와 행궁을 지으려 했던 유허지로서 명성황후에 얽힌 산교육의 장으로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