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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1004
한자 李延慶
영어음역 Yi Yeongyeong
이칭/별칭 장길(長吉),탄수(灘叟),용탄자(龍灘子),정효(貞孝)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유송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정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유송리
성별
생년 1484년(성종 15)연표보기
몰년 1548년(명종 3)연표보기
본관 광주(廣州)
대표관직 홍문관교리

[정의]

조선 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장길(長吉), 호는 탄수(灘叟)·용탄자(龍灘子). 증조할아버지는 광성군 이극감(李克堪)이고,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를 지낸 이세좌(李世佐)이다. 아버지는 봉사를 지낸 이수원(李守元), 어머니는 사용(司勇)을 지낸 방의문(房毅文)의 딸 남양방씨이다.

[활동사항]

1484년(성종 15) 충주에서 태어난 이연경(李延慶)은 1504년(연산군 10) 일어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할아버지 이세좌(李世佐)와 함께 극북(極北), 해도(海島)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급제하고 선릉참봉이 되었으나 얼마 후 사직하고 고향인 충주 북촌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정진하며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1518년(중종 13) 음서로 천거되어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 공조좌랑를 지냈다. 1519년 현량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을 거쳐 홍문관교리에 올랐다. 홍문관교리로서 경연에서 재상 선출에 관해 논의할 때 여러 차례 은혜를 입었던 조광조를 재상으로 천거했다. 평소 조광조와의 친분으로 얼마 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숙청될 때 연루되었으나 중종이 『찬인록(竄人錄)』에서 이연경의 이름을 지움으로써 유배만은 모면할 수 있었다.

기묘사화 이후 충주로 낙향하여 이자(李耔)와 더불어 산수를 주유하면서 학문 도야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1539년 평시서령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되었으나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 1548년(명종 3) 6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학문과 사상]

16세기에 김안국, 조광조 등은 『소학(小學)』의 학습과 향약의 보급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려 하였다. 특히 조광조는 성리학에 토대를 둔 지치주의를 표방하였고, 김안국 역시 당시의 풍속을 성리학적 예속으로 변화시키려 하였다. 이연경 역시 당시 사림의 핵심 인물로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학통을 이어받아 문하에서 화담 서경덕, 노수신 등을 배출하였다. 학문을 함에 있어 누추한 세속을 탈피하고 고명함에 마음을 두었으며 사서(四書)를 도(道)에 들어가는 문으로 삼았다. 특히 『대학(大學)』의 정심(正心)과 성의(誠意)의 문제를 깊이 탐구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속세의 잡념을 씻어 버리고 마음을 맑게 한 뒤에라야 거의 도(道)에 들어가는 방향을 알아서 소인이나 금수의 구덩이에 떨어짐을 면하게 되리라.”고 하였다. 또 “지(知)와 행(行)은 서로 필수적이지만 선후에 있어서 지가 선이 되어야 하며, 지를 기르는 것은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갖는 것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 64번지 선산에 있다. 이황(李滉)이 비문을 지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문주리 팔봉서원에 제향되었다. 또한 문경공 이극감(李克堪)[1427~1465], 충장공 이광악(李光岳)[1557~1608]과 함께 충청북도 괴산군 삼방리 문효사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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