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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1081
한자 許積
영어음역 Heo Jeok
이칭/별칭 묵재(黙齋),휴옹(休翁),여차(汝車)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성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성별
생년 1610년연표보기
몰년 1680년연표보기
본관 양천
대표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黙齋)·휴옹(休翁). 아버지는 보은현감 허한(許僩)이며 어머니는 김제갑(金悌甲)의 딸이다.

[활동사항]

허적은 1633년(인조 11) 24세 되던 해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7년 28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부터 주서·검열·봉교·수찬을 역임하였다. 1640년(인조 18) 허적의 행정 실무 능력을 인정했던 평안감사 정태화의 추천으로 평안도사로 발탁되었고 의주부윤겸관운향사에 승진하였다. 1645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647년에 일본 사신 다이라[平成幸]를 위법으로 접대하여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전라도관찰사에 다시 기용되었다.

1650년(효종 1) 병조참판을 거쳐 1652년 대사헌·호조참판을 역임하고 1653년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655년 호조판서를 거쳐 1658년 동지사(冬至使)로 청(淸)에 갔다 와서 1659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 해 효종이 죽고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가 일어나자 남인으로서 3년설을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 후 호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내고, 1662년(현종 3) 진하부사(陳賀副使)로 청에 다녀왔다. 1664년 우의정이 되고, 이 해 다시 사은겸진주정사(謝恩兼陣奏正使)가 되어 청에 다녀왔다. 1668년 좌의정을 거쳐 1671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송시열(宋時烈)의 논척을 받아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년) 인의대비(仁宜大妃)가 죽고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다시 일어나자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채택되어 영의정에 오르고 남인 집권기를 이룩하고 남인의 영수가 되었다. 집권한 남인 사이에 송시열의 처벌 문제로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갈라질 때 탁남의 영수가 되어 숙종의 신임을 받아 청남을 밀어냈다. 1676년 오도체찰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고 12월 사은겸진주변무사(謝恩兼陳奏辨誣使)가 되었으나 이듬해 3월 중풍이 심해 복창군 이정으로 교체되었다. 1678년 재정의 고갈을 막기 위해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통용케 했으며, 1680년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할아버지 허잠충정(忠貞)이라 시호를 받게 되어 축하연을 베풀 때 궁중의 유악(帷幄)을 함부로 사용한 일로 죄를 기다리던 중 서자 허견(許堅)의 역모 사건, 즉 경신대척출(庚申大斥黜)으로 고향인 충주에서 사약을 받았다. 1689년(숙종 15) 숙종이 그의 죽음이 무고에 의한 것을 알고 무고한 김익훈(金益勳)·이사명(李師命) 등을 죽이고 관작을 복구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케 했다.

[학문과 사상]

허적은 산림이나 학자 관료들과는 달리 철학이나 경학적인 면보다는 사회 경제적인 현실 정치면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서인을 이끈 송시열이 경상(經常)의 도리에 밝아서 명분론과 공론에 바탕을 둔 본질론자였다면 남인을 이끈 허적은 처변(處變)의 도리에 밝아서 변통론(變通論)과 재국(才局)에 바탕을 둔 실용론자였다고 할 수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허상국주의(許相國奏議)』6책 10권이 있다. 권초(卷初)를 제외한 각 권은 대체로 100여 면 정도의 분량을 기준으로 구성되었다. 권초는 사실상 85면 내외의 분량으로 다시 상·중·하 3부로 구분되어 있다. 마지막 권인 9권은 약간 분량이 적어서 27면 정도이다.

현존하는『허상국주의(許相國奏議)』판본은 성균관대학교에 소장된 『허상국주의』 필사본 6책을 합편하여 영인한 것으로, 완성된 정본이 아니라 정본을 완성하기 전 단계에서 어느 정도 체제를 정비해 놓은 초고본으로 보인다. 남인 정권이 기사환국으로 재집권하여 허적이 복관된 직후에 그의 후계자들이 남아 있던 『가승(家乘)』과 『일기(日記)』를 토대로 하되 주의(奏議)를 중심으로 편집한 저술로 보인다.

이후 갑술환국으로 관작이 추탈되면서 100여 년 이상 잊혀져 있다가 1795년(정조 19) 허적의 복관으로 이전 것을 대본으로 정본을 간행하려고 준비하다가 정조의 사후 또 다시 신유환국으로 남인이 완전히 몰락하였기 때문에 출간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남게 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묘소]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3번지 청계산에 있다. 묘역은 100여 평이며, 묘의 형태는 유돌분이며, 정경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와 여흥민씨(驪興閔氏)와 합분(合墳)이다. 상석 일체와 동자석 1조, 망주석 1조, 문관석 1조와 묘 정면에 장명등 1기가 있으며 봉분과 상석 사이에 묘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에 사우(祠宇)가 있어 허적의 아버지 허한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사우 안의 영정(影幀)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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