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22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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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建築 |
영어의미역 | Architecture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집필자 | 손태진 |
[정의]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만들어진 건물이나 구조물.
[개설]
건축 문화는 시대 조건의 반영으로 그 시대에 지역적 특성을 지닌 건축적 총체를 의미한다. 충주의 건축 문화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반도의 중원이라는 지역적인 특성을 지닌 건축적인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충주 지역이 중원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중원 지역은 제천·단양·청주·보은·진천·원주·영월·여주·안성·영주에 이르는 넓은 공간적인 범위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 건축의 발전 과정에서 시대구분은 사회적 구조나 생산 기술, 그리고 현실에 대한 건축가의 해석이나 논점에 따라 다르지만, 충주의 건축 문화를 선사시대, 고대(BC 4C경~676), 중세(676~1392), 근세(1392~1910), 일제강점기(1910~1945), 현대(1945~현재)로 구분하여 건축적 특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선사시대]
충주 지역에서 인류 최초의 주거 공간인 동굴과 바위 그늘 등의 자연 조건을 이용한 주거 공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후기 구석기시대의 사기리 창내 유적지를 통해 주거 유적을 찾아볼 수 있다. 창내 유적지는 제천군 한수면 사기리 지역에 속했으나, 1987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충주시 동량면으로 편입된 유적이다. 3~4명 정도가 당김 돌을 이용해 약 10㎡의 사냥용 막집을 세우고 출입문 바로 밖에서 화덕에 불을 피우며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 이렇게 인공을 가하여 막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비로소 주거 건축의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신석기시대에 접어들어 농경과 정착에 따른 거주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충주 지역의 유적은 충주 조동리 유적을 중심으로 한강 변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충주 조동리 유적은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에 위치한 유적으로 청동기시대의 생활 유적으로 조사되었다. 집 자리의 평면은 긴 장방형을 이루며, 14기가 조사된 불 땐 자리는 형태면에서 움, 원형 돌무지, 길쭉한 자갈돌로 만든 긴네모꼴과 둥근꼴 등 4가지가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길쭉한 자갈돌로 만든 긴네모꼴과 둥근꼴의 불 땐 자리는 두 개를 서로 이어 만들어 마치 안경 모양과 같은 꼴을 갖춘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조사된 것이다. 이 유적은 3차(1996년, 1997년, 2000년)에 걸쳐 발굴되어 신석기 문화층과 청동기 문화층이 확인되었는데, 청동기 문화층에서는 네모꼴의 집 터, 52군데 불 땐 자리, 움, 돌무지 유구 등 82개의 생활 유구가 발견되었다.
조동리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충주 지방에서 조사된 유적 중 가장 큰 규모의 생활 취락지이다. 충주 조동리 유적은 선사시대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북 지방 문화의 연계성과 생업 경제 등에 대한 연구에 기준을 제시해 주고, 또한 충주를 중심으로 한 남한강 상류 지방은 구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다른 지역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선사인이 취락을 형성하여 선사 문화가 발달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처럼 선사 문화가 발달한 것은 이 지역에 젖줄이 되어온 한강과 이에 따른 수륙 교통의 편리성, 강변의 충적평야, 철과 동 등의 물적 자원, 그리고 인적 자원이 충분한 지리적 환경에 따른 결과이다. 또한 충주를 중심으로 남한강 상류에서 발달한 선사 문화는 한반도 남부와 북부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여 선사 문화의 전파와 이동에 다리 구실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고대]
삼국시대에는 주거 문화가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 성책이 만들어졌다. 충주에 현존하는 고대의 성책 유적은 삼국이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각축전을 벌일 때 형성된 것으로 조밀하게 분포하고 있다. 주거지로는 단양 수양개 유적에서 삼한의 대규모 취락지가 조사되었고, 청주 신봉·봉명지구 내에도 주거지와 백제 촌락이 발견되었다. 삼국시대 전반기의 건축은 국읍의 일부 중심지가 성책의 시설을 갖추고, 그 내부에 주거지가 마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에는 불교 문화가 활발하게 꽃피웠다. 한반도의 중심인 충주에도 고대의 불교 문화가 성행했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충주를 중원 지역으로 확대하였을 때 불교 건축의 예는 제천의 신륵사와 덕주사, 괴산의 각연사, 보은의 법주사, 원주의 거돈사지, 영월의 법흥사, 여주의 신륵사, 안성의 칠장사, 영주의 부석사 등을 들 수 있다.
[중세]
삼국통일 후 중원경인 충주는 철이 풍부하게 생산되고, 수륙 교통이 편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북진 정책의 거점지가 되었으며, 중앙의 문화를 보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나라의 중앙에 세웠다고 하여 중앙탑이라고 부르는 국보 제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 있다. 또한 중원 지역의 예로는 원주의 법천사지, 여주의 고달사지, 영주의 숙주사지 등이 있다.
고려시대 건축 유구는 대부분 석탑·부도·석교 등의 석조물인데, 이는 사찰이 많이 분포하였다는 증거이다. 이처럼 사찰이 많았다는 것은, 사찰이 정치적 전초 기지이자 교역 거점이면서 동시에 촌락 형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충주 지역의 사찰 터로는 충주 미륵대원지, 사자빈신사지, 단호사, 창동 사지, 충주 숭선사지등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충주 미륵대원지는 남북 간의 주교통로인 계립령이 지나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는 덕주사·월광사지·사자빈사지·신륵사지 등이 입지하고 있어 사찰을 중심으로 대규모 집성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사지로 신라 말 고려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지릅재·포암산·부봉·하늘재로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하며, “명창삼년대원사주지승원명(明昌三年大院寺住持僧元明)”이라고 적힌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 사찰은 계립령의 교통로와 연계된 문화 회랑 내에 조성된 사찰로서 지형에 따라 북향하여 물길을 돌려 자리하고 있다. 미륵계 사찰로 석불입상·석등·오층석탑이 일직선상에 놓인 단탑식 배치 형식이다. 석굴의 구성은 주실과 전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실은 석불입상을 약간 뒤로 물러 배치하고 그에 맞물려 배례와 의식 공간인 전실을 달아낸 형태이다.
[근세]
조선시대의 불교는 억불정책으로 고려시대에 비하여 교세가 위축되었고 이에 따라 융성하였던 불교 예술은 쇠퇴하여 갔다. 그러나 이 시대의 건축은 유형적으로는 불사 건축, 유교 건축, 관영 건축, 주거 건축, 누정 건축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양식상 세부적인 다양성을 띠고 있다. 조선시대 충주 지역은 조운 제도가 정비되면서 수운의 요지로서 한강과 수려한 자연 조건과 어우러진 다양한 건축이 나타나고 있다.
행정구역이 정리되면서 충주읍성 내의 충주목의 관아와 객사를 비롯하여 향교 및 사묘가 배치되었다. 관아에는 동헌(東軒)인 청녕헌(淸寧軒), 정청(政廳)인 제금당(製錦堂), 수직청(守直廳)인 산고수청각(山高水淸閣)이 남아 있다. 충주목사가 집정하던 동헌인 청녕헌은 1870년(고종 7)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충주목사 조병로가 중건한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큰 규모이고 격식을 잘 갖추고 있으며 온돌 구조가 특징적이다.
유교 건축은 17~18세기에 걸쳐 서원 및 사우가 건립되면서 지방의 교화와 인재 배출에 일익을 담당한 건축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서원과 사우는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대부분 철폐되고 다시 중건된 것이 많다. 서원 철폐 때에도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충주 지역의 유교 건축의 사례를 들면, 향교와 서원으로는 충주향교·하강서원·팔봉서원 등이 있고, 사우로는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호성사·양정공 사우·한남군 사우, 장암사당·충훈사·인곡사·하강단소·충주 영모사·임경업 사우·허간 사우·충주 박팽년 사당 등이 있다.
충주 지역의 주거 건축에는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라는 지형적특성과 내륙 지방의 기후와 풍토 및 생활 방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상류 주택으로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된 중원 윤민걸 고가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된 충주 최응성 고가가 있으며, 중류 주택으로는 제내리 이민재 가옥, 용전리 최경한 가옥, 잠병리 홍석대 가옥, 대소리 고가 등 비지정 건축이 있고, 서민 주택으로는 제내리 이윤배 가옥, 제내리 이의동 가옥, 잠병리 고가 등이 있다.
충주 지역의 누정은 자연과 더불어 살려는 기능이 강조된 구조물로, 자연 속에서 풍류·관망·휴식·추모·강학·집회 등을 즐기는 장소였다. 남한강가의 수려한 경관을 관망하는 높은 곳에 위치한 탄금정·모현정·청벽정·모현정, 호암지의 경관을 바라보는 언덕에 위치한 육각정, 산천이 수려한 산마루의 열락정, 마을 안의 언덕에 위치한 삼연정, 최함월 고가 앞에 위치한 함월정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
충주 지역에서 근대 건축의 시작은 갑오개혁에 의한 근대적 행정구역 개편 이후부터 1908년 충주에서 청주로 충청북도청 이전까지의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경부선 역인 조치원에서 청주와 충주로 이어지는 충북선이 개통되자 근대적인 도시 공간 구조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충북선 개통으로 시구개정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1929년 충주 시가도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현 가로망이 완성되었다.
충주읍내 중앙의 대시장을 중심으로 4구로 나누어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도시 기반으로서 전화와 전등 설비는 1926년 충주전기주식회사가 창설되면서 증가하였으나 상하수도가 구비되지 않아 충주천과 교현천을 이용하여 발전을 하게 되었다. 충주의 가흥창과 목계는 조선시대 5대 항구의 하나로, 마포 다음 가는 한강의 주요 항구였다. 1920~1930년대에 목계의 여각과 30~40호 정도의 객주가 있었으나 일제의 도로 개수와 화물차로 인하여 수운이 쇠퇴하였다.
충주는 취락군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청인(淸人)·일인(日人)·구미인들은 기존의 관아와 가옥을 매점하여 간단하게 개조, 사용하였다. 관아인 청녕헌은 중원군 관사로, 제금당은 영빈관으로 사용되었다. 이어 서양식 왕대공 지붕틀로 만들어진 간이식 목조 건축을 지어 살다가, 1920년대 말에 건축 규모의 증대, 교통의 편리로 인한 건축 자재의 유입 용이, 건축 기술자의 도래 등의 제반 건축 여건이 조성되자 근대적 기능을 수용하는 조적식 건축이 등장하였다.
조적식 건축은 1920년대 후반부터 관청 및 공공 건축, 금융 건축을 중심으로 근대식 건물 유형으로 나타났고, 전통 건축과 혼재된 근대적인 도시 경관을 만들어냈다. 관청 및 공공 건축으로는 충주읍사무소(1917), 법원지청(1915), 충주경찰서(1921), 상무관(1924), 충주우편국(1926), 충주세무서(1937), 경성전매지국 충주출장소(1932), 충주역(급수탑 현존) 등이 있었다. 금융 상업 건축은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1918), 충주지방금융조합(1926), 대전전기주식회사 충주지점(1930), 충주연초경작조합(1917), 조선중앙무진주식회사(1939, 현존) 등이 있었다.
학교 건축으로는 충주공립심상고등소학교 본관(1931), 충주공립보통학교 본관(1932), 충주공립농업학교 본관(1930), 충주제2공립보통학교 본관(1945), 충주여자공립중학교 본관(1944) 등이 있었다. 종교 건축으로는 충주제1감리교회(1929), 충주성공회 충주성당(1931, 현존) 등이 있다. 또한 일본식 관사와 사택 건축이 혼재하고 점포 병용 주택들이 근대 시가지를 형성하였다. 주거 건축으로는 영덕리 이근영 가옥, 송강리 홍종태 가옥, 칠금동 권태성 가옥, 성내동 전래 한옥 등이 남아 있다. 그 외에 호암지, 일본인 위령비, 황색연초도입25주년기념비 등이 있다.
[현대]
해방과 동시에 적산 가옥을 분배하는 미군정기 시절의 건축은 1939년부터 시행된 건축대서사 시험제도에서 자격을 얻은 건축대서사들의 역할에 머물고 있었다. 6·25전쟁 직후부터 시작한 재건 및 부흥 주택의 건립은 1960년대에 들어서자 본격적으로 진전되었고 동시에 소방 도로의 개설, 온돌 개량 5개년 계획의 수립, 욕조의 소개 등이 이루어지면서 도시의 모습이 바뀌어 갔다.
1960년대 초에 신문 등의 언론 매체를 통하여 건축 문화 유산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면서 현대적 의미의 건축 문화 활동이 일어났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충주까지 확대되어 시행되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의 개통과 1970년 4월 농촌 지역의 지붕 개량으로부터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 후반에는 도시 지역까지 파급되어 주택 개량과 취락 구조 개선의 단계를 넘어 대형화되었고, 효용성 위주로 추진되면서 실적 면에서도 급격한 증가 추세를 나타냈다.
1960년대부터 전후 복구를 위한 기존 시가지 정비를 목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된 토지구획정리사업은 1980년 12월 31일 제정된 「택지개발촉진법」에 따라 택지개발사업으로 변경되어 도시 개발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고층 아파트 군이 세워지기 시작하였고, 1990년대에는 도심 외곽의 신흥 주택지에 고층 아파타군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산업 측면에서 충주비료공장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 대규모 비료 산업의 효시로서 1965년 중학교 사회 교과서부터 게재될 정도였으나, 현재는 제1요소제립탑·복지동·양성소·창고 등만이 남아 당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충주의 공업단지로는 1980년대 후반 중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충주제2공단(1991~1993) 산업단지가 조성 완료되었다. 산업 발전으로 도·농간 불균형이 심각해지면서 농촌 지역의 경제 활성화, 고용 증대를 통한 지역 생활 안정 등 지역 간 균형 발전의 유도하기 위해 1984년부터 농공단지사업이 추진되었다.
이 시기에는 충청북도 지역의 건축가들도 공동 주택, 근린 생활 시설 및 공장 건축을 중심으로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여, 건축 신축이 1970년대 1년 평균 40여 개였다가 1980년대 후반에는 120여 개로 급격히 증가하였고 지역 건축의 발전을 위한 각종 토론회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택지개발사업은 1990년대의 주택 200만 호 정책에 맞춰 15층 규모의 고층 아파트 단지를 이루면서 대규모 양상을 띠었다. 15층 규모의 아파트 건설 붐은 도심 고층 건물을 낳은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 충청북도 지역에서의 고층 건물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은 공개 현상 설계 경기의 정착이다. 공개 현상으로 시행된 충주시청·충주청소년수련원 등이 있고, 1990년대 후반에는 수많은 초·중등학교 공개 현상 설계 경기가 있었다. 공개 현상 설계 경기는 건축 문화의 수준을 제고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9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는 한국 건축계 전반에 걸친 제도적인 궤도 수정의 계기가 되어 철저한 건축 공사 감리와 건축 자재의 품질 관리를 위한 감리전문회사가 설립되었다. 감리전문회사는 설립 당시부터 비대한 인원 조직으로 전체적인 기수자의 안배에 문제를 안고 있었으나, 건축계에 커다란 구조적 변화를 가져왔다.
1997년 4월 16일 기공식을 출발로 본격적 공사가 추진된 중부내륙고속도로 여주~충주~구미 구간은 2004년에 완공되어 서울 및 수도권과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로가 되었다. 중부내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교류가 확대되고 그에 따른 지역민의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관광 및 도심 지구의 경관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고조되어 건축에 대한 많은 가능성을 열리게 하였다. 현재 충주의 건축계는 충주시청, 충주건축사회, 충주대학교 건축학과 등 관·산·학의 합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현상 공모, 아름다운 건축상 제정, 경관 기본 계획의 수립, 각종 세미나 개최, 건축 강좌 개설 등을 통해 건축 문화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