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3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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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中心-象徵中央塔-忠州塔坪里七層石塔 |
영어의미역 | The Symbol of the Center County, Jungangtap Pagoda |
이칭/별칭 | 탑정리 칠층석탑,중앙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최근영 |
[개설]
중앙탑은 9세기에 접어들면서 옛 백제·고구려 지역에서 등장하는 지방 세력의 반발과 반신라적 민심의 대두를 잠재우고 국가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호국적인 불교의 힘을 빌려 세운 비보적 의미를 지닌 원탑이다. 중앙탑이 충주에 건립된 이유는 그 위치가 신라 영토의 중앙에 해당되어 건탑의 목적을 널리 떨치기에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 그리고 수도 다음가는 소경(小京)이라는 점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중앙탑은 중원문화권의 중심 거점인 충주의 대표적 상징물이다.
[국토의 중심 고을이라는 의미를 지닌 중앙탑]
중앙탑의 공식 명칭은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中原塔坪里七層石塔)으로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6호로 지정되었다. 이 명칭은 지정 당시 탑이 위치한 곳의 행정지명(중원군 가금면[현 중앙탑면] 탑평리)과 탑의 층수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1916년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에는 탑평리 칠층석탑으로 칭하고 있다. 이 명칭 역시 행정구역 개편 이전의 지명(충주군 금천면 탑정리)을 따라 칭한 것이다.
일명 중앙탑이라 애칭되는 명칭이 언제부터 칭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인 1916년 작성된 탑의 수리에 관한 문서를 보면 모두 ‘중앙탑’이란 명칭을 쓰고 있다. 이 문서 말미에 “구비로 전함에 의하면 중앙탑의 명칭은 조선의 중앙지라고 전설하였다는데 유함이라”고 하여 중앙탑의 건탑 유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같은 전설은 통일신라시대의 경우 영토 위치로 보아 탑의 위치가 중앙이 되는 지점에 있기 때문에 전해진 것이라 보인다. 중앙탑은 삼국시대부터 국원(國原) 또는 중원(中原)이라 칭한 충주에 위치하여 지역적으로 중심 고을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탑이다. 충주 지역의 주민들은 공식 명칭을 거의 쓰지 않고 중앙탑으로 애칭하고 있다.
[중앙탑의 건립 시기에 대한 다양한 견해]
우리나라에서 석탑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7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백제 무왕[600~641] 때 건립한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 우리나라 석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다. 신라의 석탑으로는 634년(선덕여왕 3)에 건립된 분황사탑(국보 제30호)과 의성 탑리 오층석탑(국보 제77호)이 시원(始原)에 속하는 오래된 탑이다.
중앙탑은 현존하는 신라 석탑으로는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높은(12.86m) 탑이다. 그러나 중앙탑은 현재까지 건탑의 시기와 그 의미에 대한 견해가 일치되지 않고 있다. 중앙탑과 관련된 자료가 전혀 없어 탑의 건축 양식과 탑의 주변에서 수습되는 각종 유물이나 전설, 그리고 건탑 시기로 간주되는 시대 상황을 놓고 연구자들에 따라 달리 해석되기 때문이다.
건탑 시기와 그 의미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살펴보자. 첫째, 삼국통일 초기 또는 7세기 후반 신문왕[681~692] 때 건립했다는 설이다. 이 설은 통일 후 신라 영토의 중앙인 충주에 탑을 세움으로써 불력으로 새로 편입된 백제·고구려 지역과 그 지역민을 포용, 융합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796년(원성왕 12)에 국토의 중앙을 표시하기 위하여 건립했다는 설이다.
셋째, 9세기 전반기에 건립했다는 설이다. 이 설은 건립 배경과 그 의미에 대해 두 가지 의견이 있다. 하나는 국토의 중앙에 세웠다는 커다란 상징성과 함께 육로 및 수로의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사찰과는 무관하게 당시 성행한 풍수사상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단순한 불사 중심의 사탑이라기보다는 국가적 차원에서 호국적인 불력을 빌어 반신라적 지방 세력과 민심 이반을 진정시켜 국가적 안정을 기하기 위해 신라의 천하관인 신라 중심 사상을 선양하기 위한 비보적 의미를 지닌 상징적 원탑이라는 것이다.
넷째, 후삼국 초기에 건탑했다는 설로, 이는 충주 지역에 왕기(王氣)가 있어 그 기를 누르기 위해 세웠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건탑 시기나 그 의미는 확실한 문헌에 근거한 이론은 아니다. 앞으로도 중앙탑과 관련 있는 결정적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새로운 견해나 정설(定說)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삼국통일 초기나 신문왕대 건탑 설]
삼국통일 초기나 신문왕 대 건탑 설은, 중앙탑이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 버금가는 높이의 탑의 구조적 양식과 신라통일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이는 경주 나원리 오층탑(국보 제39호)과 상사(相似)하다는 점, 그리고 중앙탑 부근에서 수습한 와당 등을 근거로 주장한 견해이다. 그러나 문무왕[661~681]과 신문왕[681~692] 때의 정치사회적 여건 등을 고려하면 재고의 여지가 있다. 문무왕과 신문왕 때 신라 정부가 당면한 최우선의 과제는 삼국 통합에 의해 넓어진 영토와 백성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행정 및 군사제도의 정비 등이었다.
문무왕은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을 진압하였고 7년간의 대당전쟁을 통해 당의 세력을 몰아내고 대동강 입구로부터 원산만 이남을 경계로 하는 통일 대업을 완수했다. 또한 문무왕은 의상대사의 건의에 따라 당나라 군대의 축출을 위한 염원을 담아 사천왕사를 창건하는 등 반당(反唐) 의식을 높이고 신라의 자주성과 통일 의식을 선양시켰다. 그리고 북원경과 금관경을 설치하고 경주의 남산성을 증축하는 등 경주의 모습을 새롭게 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신문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681년 김흠돌의 모반 사건이 일어났고, 684년에는 고구려로부터 망명해온 안승과 그 일족인 대문의 반란이 일어나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신문왕은 녹읍제를 폐지하는 등 왕권 강화을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개편 정비하여 지방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였고, 서원경(청주)과 남원경(남원)에 성을 쌓아 군비를 강화하였고, 불교 진흥에 힘써 감은사(682)와 망덕사(685) 등을 건축했다. 또한 백제·고구려·보덕국·말갈 등 피정복민과 신라인으로 구성한 중앙 군단인 9서당을 설치하였고, 특히 689년 서원경성을 쌓았고 수도를 달구벌(대구)로 옮기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이러한 문무왕의 통일 대업 시책과 신문왕의 왕권 강화 시책을 고려하면, 통일 후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들의 반신라적 민심을 우려하여 국토의 중앙이며 삼국의 지배를 경험한 충주에 중앙탑을 세워 불력으로 피정복민을 선무하고자 했을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중앙탑의 건축 양식이 9세기 전반기의 건축 양식이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이고 보면 신문왕 때의 건탑 설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원성왕 12년 건탑 설]
원성왕 12년 건탑 설을 검토하기에 앞서 8세기 후반의 경덕왕[742~765]·혜공왕[765~780]·선덕왕[780~785] 때의 정치·사회적 상황부터 살펴보자. 8세기 중반에 접어든 신라는 왕권 강화에 대한 귀족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고 옛 고구려 영역인 북방 변경 지역에서 민심 이반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이를 막고자 경덕왕은 정찰(偵察)을 두어 관료 기풍을 감찰하였고, 아찬 정절(貞節) 등을 시켜 북변 지방을 시찰케 하였으며 황해도 지방에 매곡성 등 14군현을 최초로 설치했다. 이 같은 시책은 지방 통치와 왕권 강화에 관심을 기울인 정책이라 할 수 있다.
혜공왕 때는 왕실의 기강이 문란하여 김융의 모반 사건(770), 김은거의 모반 사건(775)이 연이어 일어나 왕도와 주군의 96각간이 서로 싸우는 대란으로 확대되었다. 혜공왕은 민심 이반을 수습하고 사회 안정을 기하기 위해서 서원경(청주)에 순행하면서 주현의 죄수를 특사하고 백좌법회를 개최하는 시책 등을 폈다. 그러나 혜공왕은 780년 김지정의 반란으로 왕비와 함께 죽음을 당하였고, 내물왕계의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했다.
선덕왕의 시책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삼국통일 후 60여 년간(675~735) 중앙의 통제력이 거의 미치지 못했던 서북 변방의 개척과 행정력 강화에 힘썼다는 것이다. 782년 패강 이남의 주군을 안무하였고 한산주에 순행하여 민호를 패강진으로 옮겼으며 패강진에 두상대감(진의 장관)을 처음으로 두었다. 이러한 시책은 옛 고구려 땅에서 태동하는 반신라적 움직임을 우려하여 취해진 것이었다.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무열왕계의 6세손인 김주원이 후계자로 추대되었다. 이 때 내물왕계는 쿠데타를 일으켜 김주원을 강릉으로 추방하고 내물왕계 12세손인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했다. 무력으로 즉위한 원성왕은 왕실 친족 집단에 의한 권력을 강화하는데 전력하였고, 근친 왕족들이 상대등·병부령 등의 요직을 독점했다.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원성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이반되는 민심을 수습하여 사회 안정을 찾는 것이 관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성왕이 시행하려던 독서삼품과에서 보듯이 진골 귀족들의 반대로 왕권 강화는 뜻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원성왕의 정치적 위상과 시책들을 고려하면 원성왕 12년에 단순히 국토의 중앙을 표시하기 위하여 거대한 중앙탑을 세웠다는 설은 타당성이 없다. 이 설에 대해서는 이미 고유섭이 탑의 양식에 의거하여 부정적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9세기 전반기 건탑 설]
9세기 전반기 건탑 설에 대한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문성왕[839~857] 즉위 전후의 시대상을 살펴보자. 9세기 초 애장왕(800~809)과 민애왕(838~839)은 반역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희강왕(836~838)은 난병에 몰려 자결했다. 이렇듯 격심한 왕권 투쟁으로 인해 정치제도 전반에 걸친 이완 현상이 나타나자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서 반신라적 세력이 나타났다.
당시 주목을 끄는 사건은 822년에 일어난 웅천주(공주)도독 김헌창의 반란이었다. 김헌창은 김주원의 아들로 지방에서의 반신라적 민심을 의식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즉 김헌창의 반란은 단순한 권력 쟁탈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은 그가 취한 국호 대위국과 연호 경운에서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후일 지방 세력이 태동하는데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김헌창의 반란을 진압한 신라는 변방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시책을 보다 강하게 실시하였다. 헌덕왕은 826년 7월 우금(금천)태수 백영에게 명하여 한산 이북의 여러 주군의 백성 1만 명을 징발하여 패강(예성강) 지역에 장성(長城) 300리를 쌓았다. 흥덕왕(826~839)은 828년 청해진(완도)을, 이듬해 당성진(남양)을 설치하였다.
특히 문성왕은 즉위 직후 우리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해상 세력가 장보고에게 진해장군이란 직함을 내려 왕권과 연계되는 중앙 귀족의 신분으로 등장시켰고, 844년 강화도에 혈구진을 설치하여 서해안 일대에 군림하는 지방 세력을 통제하는 시책을 했다. 그리고 841년 장보고가 피살되고 851년 10여 년간 유지되던 청해진을 혁파하여 그곳 주민을 벽골군(김제)으로 이주시킨 조치가 있었던 것도 문성왕대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9세기 전반기는 왕실의 안녕과 국가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었다. 9세기 전반기의 정치·사회적 정황으로 보아, 왕실에서는 불교·풍수·비보론 등의 사상적 힘을 빌어 이반되는 민심을 되돌려 국민 화합과 국가 안정을 꾀하는 방안을 최선책으로 삼지 않았나 싶다.
9세기에 들어 유독 왕실과 귀족들은 호국적 또는 자신들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원탑들을 많이 건립했다. 법광사지 삼층석탑(828)을 선두로 국왕의 원탑인 경주 창림사지 삼층석탑(855),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863) 등이 세워졌다. 또한 경주 남산 용장사 삼층석탑, 경주 남산리동 삼층석탑, 경주 서악리 삼층석탑 등은 풍수설에 의거한 원탑들이다. 이렇듯 많은 원탑들이 9세기에 들어 건립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중앙탑도 9세기 전반에 변방에서 등장하는 지방 세력과 반신라적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국가의 안정을 기원하는 호국적 원탑의 상징물로 세워졌을 개연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중앙탑을 9세기 전반기 문성왕 때의 건축물로 추론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93 중원 탑평리유적 발굴조사보고서」(1994)이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중앙탑)은 전형적인 양식도 검출되지만 9세기에 이르러 발생하는 초층탑신받침의 수법 등 후대에 나타나는 양식이 전체를 통틀어 더욱 많이 표현되어 있으며, 특히 9세기에도 신구 양식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9세기 전반기의 건립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중앙탑은 탑의 구조와 양식 등으로 보아 추정되는 9세기 전반기의 건탑 시기와 건탑의 배경으로 간주되는 9세기 중반기 전후의 정치·사회적 여건 등을 보아도 서로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이 9세기 전기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중앙탑을 건립한 주체는 누구였을까. 중앙탑 건탑의 주체에 대해 ‘충주 지역의 지방 세력이 개입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하면서 ‘주체 세력은 중원경에 거주하였던 신라계 지방 귀족들로 생각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 근거로 들고 있는 것은 왕권의 약화로 지방민의 반신라적 의식이 강하게 작용되는 시대적 상황과 황룡사탑의 수리를 30여 년이나 미룰 정도의 재정 사정을 고려하면 왕실에서 건탑을 추진했다고는 믿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탑은 중앙 정부가 주체가 되고 지방 정치인과 토호들의 협조 하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에서 예나 지금이나 지방에서 이루어지는 대역사는 중앙 정부의 협조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중앙탑을 황룡사탑의 수리에 앞서 건립했다는 점을 들어 중앙탑을 지방에서 주체가 되어 세웠다는 판단은 문헌적 근거가 없는 한 누구도 속단하기 어렵다. 특히 중앙탑을 충주에 거주하는 신라계 지방 귀족들이 세웠다면 건탑의 목적은 무엇인지 그 의미도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중앙탑 건탑의 의미는 무엇일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옛 백제·고구려 지역에서 등장하는 지방 세력과 반신라적 민심을 회유하여 범국민적 화합이라는 귀일점에 민심을 모으기 위한 상징물이라고 본다. 요컨대 중앙탑은 단순한 불사 중심의 사탑이라기보다는 호국적 불력을 빌어 지방 세력의 등장을 막고 반신라적 민심을 진정시켜 국가적 안정을 위한 염원에서 건탑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중앙탑이 육로와 수로의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녔다는 견해는 탑의 위치가 국토의 중앙이며 충주가 남북 왕래의 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남한강을 끼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면 수긍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중앙탑을 충주에 건립한 이유는 무엇일까. 충주의 위치가 신라 영토의 중앙에 해당되어 건탑의 목적을 동서 남북으로 널리 떨치기에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 그리고 충주가 수도 다음 가는 소경이라는 점이 고려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후삼국시대 초기 건탑 설]
마지막으로 후삼국시대 초기의 건탑 설을 보자. 후삼국시대는 신라가 후백제·후고구려로 분열되었다가 다시 후고구려의 뒤를 이은 고려가 신라·후백제를 통합한 시기까지 불과 40년도 채 못 되는 기간이다. 900년(효공왕 4) 궁예의 부장이었던 왕건은 충주·청주·괴산 등지를 공격, 청길·신훤 등의 세력을 평정시켜 충주 지역은 후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905년에는 신라 변경을 침탈하여 궁예의 세력은 죽령 동북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후백제의 견훤은 907년 지금의 선산 이남의 10여 성을 탈취했다. 이로써 신라는 소백산맥 외곽을 벗어나지 못한 경상도 지역만을 겨우 차지하는 소국으로 전락하여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듯 후삼국시대의 충주는 일시적으로 후고구려 영역에 속했다가 918년에 고려 태조의 세력권이 되었다. 후삼국시대의 정세로 보면 중앙탑 건립은 삼국 중 어느 나라도 불가능한 처지였다. 그리고 충주 지역에 왕기(王氣)가 있어 이를 누르기 위하여 건립했다고 하는 전설은 후삼국시대 충주의 대표적 호족 유긍달과 왕건과의 관계를 놓고 나온 속담이 아닌가 싶다.
한편 1917년 중앙탑을 해체·복원할 당시 6층 탑신에서 경감(동경) 2, 칠합 1, 은제사리병, 청동제유개합 등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하여 10세기 후삼국시대에 건탑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들 유물 중 경감은 고려시대 조성품으로, 중앙탑 창건 이후 고려시대에 재차 사리 장치를 봉안할 때 집어넣은 것으로 학계는 인정한다. 이 점에서 볼 때 후삼국시대설은 재고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