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6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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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지석묘[支石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민선례 |
[정의]
대구광역시에서 확인되는 청동기시대 무덤.
[개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주로 경제력 또는 정치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거대한 바위인 덮개돌[상석(上石)], 고임돌[지석(支石)], 석관형·석곽형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형태에 따라 탁자식(卓子式), 기반식(基盤式)[바둑판식], 개석식(蓋石式), 위석식(圍石式), 묘역식(墓域式)[구획묘(區劃墓)] 등으로 구분된다.
탁자식은 땅 위에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것으로, 중부 지역 및 북부 지역에 많아 북방식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기반식은 땅속에 무덤을 만들고 그 주위에 고임돌[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덮어 마치 바둑판 모양이며, 중부 지역 및 남부 지역에 많아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개석식은 땅 속에 무덤을 만들고 바로 위에 뚜껑으로 덮개돌을 올려 것으로, 고임돌이 없는 기반식으로 분류하여 무지석식(無支石式)이라고도 한다. 위석식은 덮개돌 아래에 자연석이나 판석(板石) 여러 매를 방형 또는 원형으로 돌려 놓은 것이다. 묘역식은 상석 아래에 돌을 깔아 여러 가지 모양의 구역, 즉 묘역을 만든 형태로 구획묘라고도 한다. 묘역 내에는 무덤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가 있다.
고인돌은 시신을 매장하는 무덤의 기능과 공동 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墓標石), 집단적 의례 행위가 이루어지는 제단, 특정 집단의 영역 표시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대구지역의 고인돌]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대구광역시는 ‘고인돌의 도시’로 불렸을 만큼 청동기시대 지배자의 무덤인 고인돌 수백여 기가 있었다고 한다. 『대구시사(大邱市史)』에는 ‘지석묘군[고인돌]은 1920년대 초기만 하더라도 옛 대구읍성 바깥에 분포해서 장관을 이루었다’라고 한다. 1927년 코야미 아키오[小泉顯夫]에 의해 대구 지역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발굴 조사인 대구 이천동 고인돌[구 대봉동 고인돌]에 대한 발굴 조사 이후 상당수의 고인돌 덮개돌이 일본인들의 정원석으로 이용되어 원위치에서 이동하게 되었다.
대구광역시의 청동기시대 고인돌 유적들은 대부분 금호강을 수계로 하는 하천변에 집중되어 있다. 수계를 중심으로 대구광역시 수성구 상동에서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에 이르는 신천 유역, 진천천과 그 주변의 월배 선상지 일대, 팔거천과 동화천 유역, 욱수천과 매호천 유역의 시지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신천 유역과 월배 선상지 일대에는 고인돌을 비롯한 청동기시대 무덤이 많이 확인되었다.
-신천 유역
대구광역시의 중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금호강에 합류하는 신천 일대의 고인돌은 주로 상류는 신천의 우안에, 중류 및 하류는 신천의 좌안에 분포한다. 신천 우안에는 대구 상동 고인돌[상동지석묘군]을 중심으로 대구 파동 고인돌, 대구 중동 고인돌이 확인되며, 신천의 좌안에는 대구 이천동 고인돌·대구 대봉동 고인돌을 비롯하여 대구 삼덕동 고인돌, 대구 동문동 고인돌, 대구 교동 고인돌, 태평로 고인돌, 대구 칠성동 고인돌, 대구 봉산동 월견산 고인돌 등이 확인된다.
‘신천 유역의 고인돌’은 주거 공간과 무덤 공간이 구분되어 배치되며, 길게 열상으로 한정된 범위 내에 매우 밀집된 분포를 보인다. 신천 유역에서는 다수의 고인돌 유적이 확인되었지만, 묘역 지석묘 또는 입석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진천천과 그 주변의 월배 선상지 일대
진천천과 그 주변에 형성된 월배 선상지 일대는 대구광역시에서 집자리, 고인돌 등 청동기시대 유적이 집중 분포하는 지역이다. 대구 월성동 고인돌, 대구 대천동 고인돌, 대구 상인동 고인돌, 대구 진천동 고인돌 등이 있고, 대천동 511-2번지 유적을 비롯한 청동기시대 무덤 유적은 고인돌에 비하여 조사된 수량의 차이가 크다.
월배 지역의 고인돌도 ‘卍’자형으로 배치된 최소 3기 내지 4기에서 최대 10여 기 정도까지 소군집화하여 한정된 범위에 매우 밀집하여 분포한다. 또한 단독 또는 연접하여 축조한 묘역식 지석묘가 확인된다. 묘역 내에는 1기 또는 여러 기의 돌널무덤을 조성하였다.
팔거천과 동화천은 금호강 북안에 뻗어 있는 지류로 팔거천 유역에는 대구 동천동 취락유적이, 동화천 유역에는 대구 서변동 유적이 있다. 두 유적 모두 대구광역시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대표 취락유적이며, 확인된 집자리의 수량에 비하여 청동기시대 무덤의 수가 현저히 적다. 고인돌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고인돌로 추정되는 돌널무덤이 취락의 외곽에서 확인된다.
시지 지역의 고인돌은 욱수천과 매호천 등 소하천들에 의하여 형성된 선상지의 선단부에 열을 지어 만들어졌다.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된 대구 사월동 지석묘군을 비롯하여 대구 매호동 고인돌, 대구 시지동 고인돌, 욱수동 134번지 유적 등이 있다.
대구 사월동지석묘군, 대구 매호동 고인돌, 대구 시지동 고인돌은 일렬로 분포하고 있으며, 고인돌 내에서도 1~4열의 지석묘·석관묘가 열을 지어 배치되어 있다. 대구 시지동 고인돌Ⅱ에서는 묘역 지석묘, 대구 매호동 고인돌에서는 위석식 고인돌이 확인된다.
대구광역시의 고인돌은 대부분 개석식이며, 일부 위석식과 묘역식이 확인된다. 신천 지역과 월배 지역에서 확인되는 고인돌의 소군집 단위화는 청동기시대 중기 전반부터 금호강 하류역에 만들어진 고인돌 유적의 특징으로 파악된다.
고인돌에서는 붉은간토기[적색마연토기(赤色磨硏土器)], 간돌칼[석검], 돌화살촉[석촉], 돌도끼[석부], 곡옥·관옥 등의 옥류 등이 출토되었으며, 청동제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전기 후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후기까지 이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고인돌 축조의 중심 연대는 송국리 유형 단계인 청동기시대 중기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