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5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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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命建 |
영어공식명칭 | Lee Myeonggeon |
이칭/별칭 | 이여성(李如星),정청(靑汀)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출생 시기/일시 | 1901년 12월 29일 - 이명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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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7일 - 이명건 혜성단 결성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7월 19일 - 이명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10월 9일 - 이명건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11월 17일 - 이명건 경성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으로 징역 3년형 확정 |
활동 시기/일시 | 1944년 - 이명건 건국동맹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이명건 월북 |
출생지 | 신리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리 |
학교|수학지 | 릿쿄대학 - 일본 도쿄시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혜성단 단원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이명건(李命建)[1901~?]은 1901년 12월 29일 지금의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대구에서 비밀결사 혜성단(彗星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여성(李如星)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가계]
이명건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청정(靑汀)이다. 아버지는 이경옥(李敬玉)이고, 어머니는 윤정열(尹貞烈)이다. 화가 이쾌대(李快大)가 동생이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던 대구 계성학교 학생들은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의 방향을 전환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만주에서 무장 독립운동 기지 건설 활동을 전개하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국내로 돌아와 있던 이명건은 1919년 4월 17일 김수길(金壽吉)·이영식(李永植)·이종헌(李鍾憲)·이수건(李壽鍵)·이덕생(李德生)·이영옥(李榮玉) 등 계성학교 학생들 및 최재화(崔載華)·이종식(李鍾植)과 함께 비밀결사 혜성단을 결성하였다.
이명건을 비롯한 혜성단원들은 4월 18일 「근고아동포(謹告我同胞)」, 4월 27일 「경아동포(警我同胞)」, 5월 7일 「경고관공리동포(警告官公吏同胞)」 등을 배포하였으며, 민족 자산가들에게는 독립운동 자금 헌금을 호소하였다. 상인들에게는 폐점 철시 및 일본인과의 거래 중지, 노동자들에게는 파업을 통한 독립운동 참가를 촉구하였다. 또한 대구경찰서장과 친일 인사들에게 암살 협박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1919년 5월 14일 김수길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면서 혜성단의 실체가 드러나 이명건도 단원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7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출판법」 위반,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협박 및 사문서 위조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았다. 이명건은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10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1심보다 형량이 늘어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며, 11월 17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으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명건은 만기 출소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의 릿쿄대학[立敎大學] 정치경제학과에서 공부하였으며, 이때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또한 사회주의 단체인 북성회(北星會)·일월회(日月會) 등을 조직하였다. 1929년 귀국 이후에는 주로 언론 활동을 하였다. 1944년 여운형(呂運亨)·조동우(趙東祐)·이만규(李萬珪) 등과 건국동맹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는 조선인민당·사회노동당 등 사회주의 계열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초 월북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명건의 저술로는 『수자조선연구(數字朝鮮硏究)』, 『조선복색원류고(朝鮮服色原流考)』, 『조선미술사개요(朝鮮美術史槪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