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8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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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永植 |
영어공식명칭 | Lee Yeongsik |
이칭/별칭 | 성산(惺山),청산유수(靑山流水)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종교인·사회사업가.
[개설]
이영식(李永植)[1897~1981]은 1897년 12월 13일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이천동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혜성단(彗星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대구 시내 상인들에게 폐점 철시를 요구하고 대구경찰서장 및 친일 인사들에게 암살 협박문을 발송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에는 특수학교를 설립하는 등 사회사업에 매진하였다.
[가계]
이영식의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호는 성산(惺山) 또는 청산유수(靑山流水)이다. 아버지는 이순구(李順九), 어머니는 김덕희(金德喜)이다. 부인은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 박두순(朴斗順)이고, 대구대학교 초대 총장인 이태영(李泰榮)이 아들이다.
[활동 사항]
이영식은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김수길(金壽吉) 등의 계성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시위에서 157명이 검거되었고, 그중 67명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당시 이영식은 체포되지 않았지만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궐석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았다.
서문시장 만세 시위 이후 이영식은 3월 16일 계성학교 학생들과 함께 김수길의 하숙집에 모여 독립운동 방법을 전환하기로 결의하였다. 독립운동의 확산과 조직화를 위하여 1919년 4월 17일 김수길을 비롯한 최재화(崔載華)·김수길(金壽吉)·허성도(許聖徒)·이덕생(李德生)·이종식(李鍾植)·이종헌(李鍾憲)·이기명(李基明)·이수건(李壽鍵)·이영옥(李榮玉)·이명건(李命健) 등과 비밀결사 혜성단을 결성하고 경성과 만주에 지부를 설립하였다.
혜성단은 4월 18일 「근고아동포(謹告我同胞)」, 4월 27일 「경아동포(警我同胞)」, 5월 7일 「경고관공리동포(警告官公吏同胞)」 등을 배포하였으며, 민족 자산가들에게는 독립운동 자금 헌금을 호소하였다. 상인들에게는 폐점 철시 및 일본인과의 거래 중지, 노동자들에게는 파업을 통한 독립운동 참가를 촉구하였다. 또한 대구경찰서장과 친일 인사들에게 암살 협박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1919년 5월 14일 김수길이 체포되면서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 이영식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19년 7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출판법」 위반,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협박 및 사문서 위조 혐의로 징역 1년 6월을 언도받았고, 10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영식은 출옥 후 1926년 일본의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에서 유학하였다. 당시에도 재일교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발각되어 1주일간 구금되기도 하였다. 1927년에서 1936년까지 대구서문교회 목사로 시무하였으며, 7년간 대구 애락원(愛樂園) 나환자 교회에서도 시무하였다. 1939년경에는 함경북도 성진중앙교회 목사, 1941년 9월부터 만주 간도 명월구(明月溝)의 제일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다. 이영식은 목사로 시무하면서도 교인과 교민들에게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1943년부터 일본 요코하마의 조선인 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면서도 민족의식과 독립 의지가 높아 일제로부터 '악질 목사'로 지목받아 징용에 동원되었다.
이영식은 8·15 광복 이후 일본에서 돌아와 대구 애생원을 설립하고 나환자 교회인 애생교회[현 신촌교회]를 설립하여 시무하였다. 1946년에는 대구맹아학원(大邱盲啞學院)을 설립하여 장애인 교육과 복지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53년 경상북도사회사업연합회 회장, 1954년 한국맹농아교육기관 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56년 특수교육 분야의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한국이공학원을 설립하였다. 1961년 한국사회사업학교가 정규 4년제 대학인 한국사회사업대학[현 대구대학교]으로 승격되면서 초대 학장이 되었다. 1966년 지적장애 학생들을 위한 사립 특수교육 기관인 대구보명학교, 1967년 지체장애아를 위한 대구보건학교를 설립하였다. 1977년 해외희생동포위령사업회 고문을 역임하였다. 이영식은 1981년 12월 8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영식의 저술로는 『I Cast Out Fear』[Evelyn Hannon, 1969]가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영식의 공적을 기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63년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고, 1967년 5·16민족상 교육 부문 본상을 수상하였으며, 『세계인명사전[Who’s Who in the World]』에 등재되었다. 1971년 국민훈장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