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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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都正浩 |
영어공식명칭 | Do Jeongh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일수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도정호 국채보상운동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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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2월 17일 - 도정호 대구금연상채회 평의원 선임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민족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금연상채회 평의원 |
[정의]
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개설]
도정호(都正浩)[?~?]는 대한제국의 외획 제도로 운영된 경남봉쇄원에서 활동하였으며,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廣文社) 내 문회(文會)는 특별총회를 열어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명칭을 변경하고 국채보상운동을 결의하였다. 1907년 2월 17일 광문사 사장이자 대동광문회 부회장이던 김광제(金光濟), 광문사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대동광문회장 박해령(朴海齡) 등을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위한 조직으로 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와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가 설립될 때 도성호는 금연상채회 평의원으로 참가하였다.
금연상채회는 수창사에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하였고, 2월 21일 대구민의소 주최로 서문 밖 북후정에서 국채보상을 위한 군민대회를 개최하였다. 도정호는 2월 24일에 있었던 2차 대구군민대회에 참여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다. 이후 도정호는 서상하(徐相夏)·이근영(李根泳)과 함께 서울에 파송되어 각계의 참여와 지원을 요청하였다. 또한 금연상채회의 제1회 의손 모금에 2원 60전을 특별 의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