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7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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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漢緯 |
영어공식명칭 | Yang Hanwi |
이칭/별칭 | 양한체(梁漢締)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세윤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양한위(梁漢緯)[1883~1949]는 1883년 4월 12일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에서 태어났다. 대구에 거주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고,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배포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양한체(梁漢締)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양한위는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다짐하였고, 11월경 권태일(權泰鎰)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모의하였다. 이후 서울에서 수집한 『독립신문』과 독립경고문 등 수십 장을 허병율(許秉律)·조선규(趙善奎) 등에게 발송하였고, 대구 시내에도 경고문을 배포하여 많은 사람들이 돌려보게 하였다.
양한위는 1920년 1월부터 권태일·오기수(吳麒洙) 등과 함께 8,000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냈으며, 조선규를 설득하여 독립운동 자금 740원을 헌납하게 하였다. 또한 대구 출신의 동지 조기홍(趙氣虹)과 함께 일제 관헌 습격과 관사 폭파를 계획하였으며,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1920년 6월 대구 남문시장에서 폭탄 입수와 제조를 꾀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기도 하였다. 1921년 1월에는 권충락(權忠洛) 등 4명과 함께 달성(達城)의 부호 최재교(崔在敎)를 방문하여 독립자금 240원을 모금하였다.
양한위는 1922년 초까지 만주에서 활동하는 흥업단과 의용단의 국내 특파원들과 연계 활동을 펼치다가 1922년 5월 27일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양한위는 1949년 4월 30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양한위의 공적을 기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