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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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鎭弘 |
영어공식명칭 | Jang Jinh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장진홍(張鎭弘)[1895~1930]은 1895년 6월 6일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문림리[현 구미시 옥계동]에서 태어났다.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하다가 1926년 국내로 들어와 대구의 대표적인 식민지배기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가계]
장진홍의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아버지는 장성욱(張聖旭), 어머니는 순천김씨(順天金氏)이다.
[활동 사항]
장진홍은 인명학교(仁明學校)[현 구미 인동초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14년 조선보병대에 입대하여 복무하다가 1916년에 상등병으로 제대하였다. 이후 광복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18년 중국 선양[瀋陽]에서 김정묵·이국필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였다. 장진홍은 이국필과 함께 러시아 하바롭스크로 건너가서 한인 청장년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나, 당시 연해주에서 러시아 적군과 백군의 내전이 격렬해지자 귀국하였다.
장진홍은 1926년 12월 무렵 서울에서 국제공산당원 이내성(李乃城)으로부터 국제공산당의 결사대가 되어 혁명운동에 종사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1927년 4월 무렵 경상북도 경산에서 이내성의 소개로 일본인 폭탄 전문가 호리키리 무사부로[堀切茂三郞]를 만나 폭탄 구입을 요청하였다. 5월에 영천에서 호리키리 무사부를 다시 만난 장진홍은 완성된 폭탄 대신 폭탄 제조법을 익혔다. 뒤이어 일본인 고바야시[小林峯次]로부터 다이너마이트와 뇌관 30개, 도화선 25척을 15원에 사들여 10월 16일 점화식 시한폭탄 5개와 자결용 소탄 1개를 직접 제조하였다.
장진홍은 직접 제조한 폭탄으로 대구의 대표적인 식민지배기구인 경북도청·경북경찰부·조선은행 대구지점·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과 친일 부호 장 모의 집을 폭파하기로 계획하였다. 10월 17일 오전 2시 무렵 장진홍은 자결용 소탄(小彈) 1개는 품속에 지니고 다른 대탄(大彈) 4개는 자전거에 실어 자택을 출발하였고, 오후 5시경 대구 달성정(達城町)에 있던 매서(妹胥) 김상한(金商翰)의 집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었다.
장진홍은 1927년 10월 18일 오전 9시 무렵 덕흥여관(德興旅館)에 투숙한 뒤 객실에서 나무상자 네 개에 폭탄을 넣어 신문지로 다시 포장하였다. 오전 11시 30분 무렵 도화선에 불을 붙이 뒤 여관 종업원 박노선(朴魯宣)에게 부상을 핑계 삼아 선물용 벌꿀이라며 폭탄이 든 상자를 조선은행 대구지점·스도[須藤] 지사·이미모토[石本] 경찰부장·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등에 차례로 배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박노선은 신문지에 싸인 나무상자를 조선은행 대구지점 주임 후쿠치 다카하시[福地興三]에 전달하였다. 이때 일본 포병 출신의 은행원 요시무라 게츠[吉村潔]가 화약 냄새를 맡고서 나무상자를 열어 도화선을 차단하였고, 다른 폭탄 상자 3개와 함께 은행 앞 공간에 옮겼다. 이내 폭탄 3개가 연이어 폭발하여 현장에 있던 은행원과 경찰 등 5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은행 창문의 유리 파편이 사방에 떨어졌다. 장진홍은 선산군 해평면으로 피신하여 동지 황진박(黃鎭璞)·박관영(朴觀永)을 만나 거사 성공을 자축하였다.
사건 발생 후 일제 경찰은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범인 검거에 주력하였다. 그 과정에서 1928년 1월 이정기(李定基)를 비롯한 8명을 검거하여 고문을 가한 뒤 진범으로 꾸며 재판에 회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장진홍은 재차 안동의 경찰서와 은행, 영천의 경찰서와 친일 부호 이인석(李麟錫)의 집을 폭파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일제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지자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1928년 2월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장진홍은 일본에서도 도쿄의 귀족원과 경시청에 폭탄을 던진 뒤 러시아로 망명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경상북도 경찰부 고등계 경부 최석현(崔錫鉉)이 장진홍을 범인으로 특정하면서 수사망이 좁혀졌다. 장진홍은 일본 오사카[大阪] 천왕사 앞에서 안경점을 경영하던 동생 장의환(張義煥)의 집에 은신하고 있다가 이를 탐지한 일제 경찰에게 1929년 2월 14일 자정 무렵 체포되었다.
1929년 2월 19일 장진홍은 대구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고 대구지방법원 검사국[현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되었다. 1930년 2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살인미수, 살인예비 등 무려 5개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은 뒤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장진홍은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도 사형이 언도되자 7월 21일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장진홍은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1930년 7월 30일 밤 11시 30분경 옥중에서 자결하였다.
[묘소]
장진홍의 묘소는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남율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장진홍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구미시 진평동 동락공원에 장진홍을 추모하는 동상이 건립되었으며, 1995년 6월 국가보훈처로부터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