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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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杜師忠- 慕明齋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525길 14-21[만촌동 715-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석배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2년 - 「두사충과 모명재」 『한국구비문학』Ⅱ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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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9년 - 「두사충과 모명재」 『대구지명유래총람』에 수록 |
관련 지명 | 모명재 -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525길 14-21[만촌동 715-1]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두사충 |
모티프 유형 | 지명유래담 |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모명재와 관련하여 전하여 오는 이야기.
[개설]
「두사충과 모명재」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모명재(慕明齋)에 관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모명재는 조선시대에 귀화한 명나라 장군 두사충(杜師忠)의 후손이 선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재실이다.
[채록/수집 상황]
「두사충과 모명재」는 2002년에 펴낸 『한국구비문학』Ⅱ와 대구광역시에서 펴낸 『대구지명유래총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모명재는 임진왜란(壬辰倭亂)[1592]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의 후손이 선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재실이며,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다.
두사충은 중국 두릉(杜陵)[두링]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1598]과 함께 우리나라를 돕기 위하여 왔다. 두사충의 임무는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였는데, 이순신(李舜臣)[1545~1598]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임진왜란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정유재란(丁酉再亂)[1597] 때 매부와 함께 다시 원병으로 왔다가, 우리나라에 정이 들어 귀국하지 않고 귀화하였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에서는 현재의 경상감영공원(慶尙監營公園) 자리를 주어 살게 하였다. 두사충은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자신이 살던 곳으로 옮겨 오자 땅을 모두 내놓고 지금의 계산동(桂山洞)으로 옮겨 살았다.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에 두씨가 많이 모여 살게 되었고, 두씨 일가가 주위에 뽕나무를 심어 일대가 뽕나무 골목으로 불리게 되었다. 두사충은 노년에 고향을 그리워하여 최정산(最頂山)[지금의 대덕산(大德山)] 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고 붙였다.
두사충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자녀들에게 자신의 묘지 터를 알려 주기 위하여 고산(孤山)으로 향하였으나, 워낙 쇠약한 몸이라 목적지까지 이르지 못한 채 담티고개에서 되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사충은 형제봉의 명당을 가리키며 묻어 달라고 하였지만, 거기에 묻히지 못하고 형제봉 기슭에 묘지 터를 잡았다.
[모티프 분석]
「두사충과 모명재」는 두사충의 이야기와 두사충의 묘지 터가 있는 모명재를 주요 모티프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