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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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喇叭- 破軍峙- 由來 |
영어공식명칭 | The Origin of Napalgogae Pass, Wangsan Mountian, Pagunja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석배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6년 10월 2일 - 「나팔고개, 왕산, 파군재의 유래」동구 지묘3동 주민 박성서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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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나팔고개, 왕산, 파군재의 유래」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
채록지 | 「나팔고개, 왕산, 파군재의 유래」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왕건|신숭겸|견훤 |
모티프 유형 | 지명유래담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일대에 있는 나팔고개, 왕산, 파군재 지명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
[채록/수집 상황]
김광순, 『한국구비문학』(국학자료원, 2001)
김기현, 『대구 동구의 오래된 이야기』(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문화원, 2013)
인터뷰(지묘3동 주민 박성서, 남, 78세, 1986. 10. 2)
[내용]
후삼국시대 때 신라가 후백제의 침입으로 큰 위기에 처하게 되자 신라 경애왕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고려 왕건은 친히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지묘동 일대에서 후백제 견훤군과 일전을 벌였지만 크게 패했다. 이 전투가 927년에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일대에서 치뤄진 공산전투이다. 현재까지도 공산전투와 관련된 일화가 지명유래담으로 남아 있다.
1) 나팔고개
공산전투 당시 견훤의 군대가 지묘동 고개에서 왕건의 군대를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히면서 나팔을 불었다고 한다. 이에 지묘동고개를 ‘나팔고개’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왕건군이 무태를 지나 6㎞ 정도를 행군할 때 사기를 높이기 위해 나팔을 불었다고도 하여 이 고개를 나팔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2) 왕산(王山)
고려의 군대는 나팔고개를 넘어 후백제의 군사들과 일전을 치르게 되었다. 고려의 군대는 크게 패하였고, 고려 왕건은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때 신숭겸(申崇謙)[?~927) 장군이 왕건을 살리기 위해 왕건의 전복(戰服)을 입고 왕건으로 가장하여 적군의 눈을 속이고, 왕건은 이 틈을 타서 지묘1동의 북쪽 산으로 피신하여 화를 면했다. 뒷날 이 산을 왕[왕건]을 살린 산이라 하여 왕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3) 파군재
파군재는 불로동에 있는 고개이다. 고려의 군사들은 왕건이 왕산을 통하여 무사히 탈출한 뒤에 신숭겸을 중심으로 후백제군에 끝까지 결사항전하였다. 지묘2동과 파계사 사이의 뒷산을 뚫고 위장전술을 펴기도 했으나, 후백제의 군사들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이후 신숭겸은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동화사 고갯길로 탈출을 모색했으나 후백제의 매복한 군사들에 의해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고려군이 제1차로 파해서 흩어진 곳을 ‘아래 파군재’, 2차로 파한 곳을 ‘윗 파군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파군재는 후백제의 군사가 고려의 군사를 깨뜨렸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고려의 군대가 전멸당한 뒤 견훤이 후백제 군사의 진을 거두어 들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모티프 분석]
「나팔고개, 왕산, 파군재의 유래」는 동구 지묘동 일대에 전하는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전투에 관한 지명유래담을 주요 모티프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