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3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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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鳳舞亭記 |
영어공식명칭 | Records of Bongmujeong Pavilio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86년 - 「봉무정기」최상룡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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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49년 - 「봉무정기」최상룡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96년 - 「봉무정기」간행 |
배경 지역 | 「봉무정기」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성격 | 잡기류|누정기 |
작가 | 최상룡 |
[정의]
조선후기 학자 최상룡이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 있는 봉무정에 대해 적은 기문.
[개설]
최상룡[1786~1849]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자는 덕용(德容), 호는 봉촌(鳳村)이다. 최상룡은 달성(達城)의 강동(江洞)[현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서 출생했다. 최상룡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했다. 세상이 어지러워 분경(奔競)[엽관운동]이 심해짐을 보고 향리로 돌아와 독암서당(讀巖書堂)을 지어 후진을 가르치니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 문전을 메웠다. 당시 대학자인 홍직필(洪直弼)·유치명(柳致明)·김익동(金翊東) 등과 경전과 예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경전(經典)의 주요 내용을 도시(圖示)[그림이나 도표 따위로 그려 보임]하여 맥락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성리학과 훈고학을 깊이 연구해 「사서변의(四書辨疑)」·「재이록(在邇錄)」·「소학췌의(小學贅疑)」·「계몽차의(啓蒙箚疑)」·「정주서변의(程朱書辨疑)」 등 많은 논문을 남겼다. 저서로는 『봉촌문집(鳳村文集)』 22권이 있다.
[구성]
「봉무정기(鳳舞亭記)」는 봉무정이 있는 봉무동 마을에 관한 소개, 정의 구조와 의미, 봉무정 건립의 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내용]
「봉무정기」를 요약한 내용이다.
달구벌 치소 북쪽 20리에 있는 촌이 봉무촌(鳳舞村)이고, 가운데 독좌암(獨坐巖)이 있다. 봉무라고 명명한 것은 산세가 봉황이 춤추는 듯해서라고도 하고, 옛날에 봉새가 와서 춤춘 적이 있다고 해서라고도 하는데,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독좌암이라고 하는 것은 고로(古老)가 전하는 바로는 고려 왕건이 견훤의 병사를 피해 파군현을 넘어 여기에서 홀로 앉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봉무촌은 열 집 정도의 잔약한 동네로 통구대로(通衢大路)에 위치해 있다. 순박하고 정직한 동네라고 고을에 칭해진다. 옛날에 군자가 여기에 거처해서 유풍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위 위에는 큰 회나무 세 그루가 구름을 뚫고 우뚝 솟아있고, 바위는 평평해서 열 명 남짓이 앉을 만하다. 팔공산은 그 뒤에 있고, 금호는 그 앞에 있어서 풍경이 좋다. 이에 일동(一洞)에 도모하여 오가(五架)의 제도로 축조하였다. 동쪽 온돌방은 덕교재(德敎齋)라고 명명하였다. 서쪽 온돌방은 예용재(禮用齋)라고 명명하였다. 이는 『논어(論語)』의 “인도하기를 덕으로써 하고, 가지런하기를 예로써 한다.”라는 가르침을 취하였다.
「동규(洞規)」의 본말을 겸해서 봉무촌강당(鳳舞村講堂)이라 하고 일동의 강약의 뜻을 밝혔다. 바깥은 ‘봉무정(鳳舞亭)’이라고 편액하고, 사우들과 문회(文會)를 하는 장소라는 뜻을 겸하였다. 바위의 위쪽 큰 나무의 아래에 강단을 만들어 붕우들이 예를 익힐 수 있게 하였다. 반석을 얻어서 관가단(觀稼壇)이라고 하고 여민동락(與民同樂)의 뜻을 보였다. 서쪽 봉우리 위에 평평한 언덕을 얻어서 회원대(懷遠臺)라 하고 초연히 홀로 터득한다는 의미를 부쳤다. 산의 형세는 높지 않고 나쁘지도 않아서 마치 군자의 마음 씀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것과 같다. 서당의 기틀은 깊은 산도 아니고 도시도 아니니 마치 군자의 출처가 세속을 끊지도 않고 세속에 부합하지도 않는 것과 같다. 사림들이 이 서당에 올라 이 즐거움을 느껴서 글 읽는 소리가 양양하게 들린다면 삼대의 유풍을 다시 얻고 조양의 봉황이 오늘날에 다시 볼 수 있으리라.
[특징]
「봉무정기」는 봉무동, 봉무정의 관계, 봉무정 건립 의의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기문을 구성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