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0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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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內 最大- 門中 文庫, 仁壽文庫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 |
집필자 | 정은영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있는 3대 100년에 걸쳐 완성된 국내 최대의 문중 문고.
[개설]
인수문고(仁壽文庫)는 약 200여 년 전부터 인흥 마을에 세거지를 형성한 남평 문씨 가문이 3대 100년에 걸쳐 고서를 모아 만든 국내 최고의 문중 문고이다. 현재의 인수문고는 인산재(仁山齋) 문경호(文敬鎬)[1812~1874 ]의 손자와 증손자인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1854∼1923]과 수봉(壽峯) 문영박(文永樸)[1880∼1930] 부자가 세운 광거당(廣居堂)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1910년에 광거당을 짓고 본격적인 서적의 수집과 교육 등을 통해 후진 양성과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의 발로로서 민족의 역사와 문자[글] 등을 보존하고자 했다. 전문가들의 회의를 통해 구입할 서적을 선정하면, 국내외를 망론하고 자금을 마련하여 서적을 구비하였다. 그 결과 현재에는 약 2만 권에 이를 정도의 방대하고 다양한 서적과 고문서가 수집되었는데, 철저한 보관 관리를 통해 서적의 낙질이 없고, 상태도 깨끗한 것이 특징이다.
[인흥 마을과 남평 문씨의 정착]
남평(南平)은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산포(山浦)·금천(金川)·봉황면(鳳凰面) 등 동부 지역 일대의 옛 지명이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남평군이 폐지되어 나주군에 통합되고, 1995년 통합 나주시가 되면서 나주시 남평면이 되었다. 남평 문씨의 시조는 신라 20대 자비왕 때의 사람인 남평백(南平伯) 문다성(文多省)으로,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면 동쪽에 장자지(長者池)라는 큰 바위 위의 석함(石函)에서 나왔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고려 개국 벽상공신(壁上功臣) 남평백에 봉해져 남평을 관향으로 하였다. 시조가 태어난 바위에 '문암(文巖)'이라는 비를 세우고 못가에 장연 서원을 지어 매년 음력 9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남평 문씨가 인흥 마을에 본격적으로 세거지를 형성한 것은 인산재 문경호 때였다. 인산재는 문무일(文武一)[1777~1833]의 넷째 아들인데, 아버지 문무일은 남평 문씨 시조인 문다성의 29대 손자이자,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1329~1398]의 17대 손자이다. 그가 화원 인흥의 윗마을을 택해 분가하고, 또 말년에 마을 왼편 천수봉(千壽峰) 기슭의 새터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인흥의 개기조(開基祖)가 된 것이다. 한말 유학자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1850~1927]이 쓴 인산재의 묘갈명(墓碣銘)을 보면, 추모재(遠慕齋)와 영모재(永慕齋) 두 재사를 세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묘소를 극진히 돌본 일화 등을 거론하며, 그의 효성과 인후(仁厚)함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흥 마을 후은공파(後隱公派)의 조상은 20대손 문지우(文之佑)까지 송경(松京)과 경기 파주에서 주로 거주하다가, 16세기 초 문지우의 첫째 아들인 통덕랑 문세근(文世根)이 대구의 달구현으로 이거하면서 비로소 대구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문세근은 처가[달성 서씨]가 있는 곳으로 와서, 대구부역 서중면(西中面)[현 달서구]에 새 터전을 잡으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사람이 곧 남평 문씨대구 입향조이다. 후은공파의 가계 내력은 이때부터 문동현(文東顯), 문영남(文榮南), 문만천(文萬天)까지 계승되다가, 25대손에서 문만천의 둘째 아들 문진장(文震章), 문진장의 첫째 아들 문재징(文在徵), 문재징의 셋째 아들 문의찬(文義燦), 문의찬의 둘째 아들 문덕수(文德粹), 문덕수의 둘째 아들 문무일, 문무일의 넷째 아들 문경호로 이어져 왔다.
인산재 문경호에게는 네 아들 문철규(文哲奎), 문달규(文達奎), 문처규(文處奎), 문응규(文應奎)가 있었는데, 이 중 맏아들 문철규가 일찍 죽었다. 이에 둘째 아들 문달규는 자신의 맏아들인 문봉찬(文鳳瓚)을 형에게 출계(出系)[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시켰고, 둘째 아들 문봉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대를 잇도록 하였다. 문달규는 인산재와 함께 인흥 개척의 기초를 탄탄히 하고, 또 확장해 나갔다.
문경호의 손자 수봉 문영박이 쓴 「조고부군가장(祖考府君家狀)」에 의하면, 문봉성은 인흥 세거지를 개척함에 있어 문경호와 함께 시작에서 끝까지 공사에 직접 참여하여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 중년 이후에는 언제나 책을 가까이 하면서 사랑채 남쪽 창 아래에 오죽(烏竹) 10여 그루를 심어 즐겨 구경했으므로, 죽헌(竹軒)이란 호를 스스로 붙였다고 한다. 이 죽헌가의 대를 이은 것이 후은 문봉성이다. 그는 지금의 인흥 세거지의 전역을 하나로 만드는 한편, 옛 서사(書舍)[선비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집] 용호재를 헐고 광거당을 세워 손님을 맞고 책을 갈무리하는 곳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러한 문봉성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서적 애호의 면모에 기초하여 지금의 인수문고가 이루어진 것이다.
문봉성은 슬하에 문영근(文永根), 문영박, 문영환(文永桓) 등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소은(小隱) 문영근은 28세의 나이로 요졸하였고, 둘째 아들 수봉 문영박은 부친 문봉성과 함께 수봉 고택과 광거당을 새로 짓는 등 인흥의 중심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셋째 아들 보당(保堂) 문영환 역시 「광거당 전수 규약(傳守規約)」을 만들고, 세보를 편찬하는 등 인흥 마을을 지키는 데 정성을 다했다. 이들은 당대 유학자 치주(恥宙) 손정은(孫廷誾),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등에게 사사하면서 유학의 전통을 계승하려 하였다. 현재까지도 인흥 마을에는 후은 문봉성의 후손들이 많이 모여 살며, 조상의 유지를 잘 받들고 있다.
[광거당과 수봉 정사, 그리고 인수문고에 이르기까지]
인수문고는 후은 문봉성과 수봉 문영박 부자가 세운 광거당에서부터 시작된다. 1910년 문호의 확장을 위하여 옛 재실을 헐고 건축한 건물이다. '광거당'이라는 당호는 『맹자(孟子)』의 '거천하지광거(居天下之廣居)'에서 연유했다. 문봉성과 문영박 부자는 자제들의 학문과 교양을 쌓기 위해 광거당을 지어 책을 수집하고, 선비와 후손들이 공부할 수 있는 장소로 삼았다. 만 권의 전적을 소장하였으며, 국내의 많은 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광거당의 서책은 매우 의도적이며, 조직적으로 수집되었다. 수봉 문영박은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중국에 망명 중이던 한말 사학자인 창강 김택영 등과의 논의를 통해서 자료를 선별하고 수집하였다고 한다. 당시 상해에 있던 김택영의 도움으로 중국의 서책들을 목포까지 배편으로 이동하였고, 목포에서 달성군 인흥리 광거당까지 육로로 이동하여 서책이 집적되었다. 광거당의 서책은 수집뿐만 아니라 관리에 있어서도 상당히 특별하였다. 수집된 장서를 잘 보관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1939년에는 「광거당 전수 규약」을 만들었다. 이 규약은 후손에게 학업과 조상을 극진히 하며, 손님을 예와 경으로 대접하게 하는 지침이 되었고, 서적의 관리를 엄격히 하고 자료의 보존과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거당과 더불어 서책이 보관되어 있던 곳은 1936년에 세워진 수봉 정사(壽峰精舍)[수백당이라고도 함]이다. 많지 않은 서책이 보관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곳은 문영박을 추앙하기 위해 다섯 형제가 합력하여 세운 정사이다. 광복 후 격변이 연속되고 사회 질서가 매우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서당이나 재실의 기능도 점차 쇠퇴하여 서책을 합리적으로 관리할 방안이 필요하였다. 때문에 집안의 논의를 통해 1970년에 수봉 정사 구내에 존안각을 지었는데, 이곳에서 수봉 정사의 서책과 광거당의 만 권의 서책을 통합하여 보관·관리하게 되었다. '인수문고'라 명명한 것도 존안각으로 옮겨 관리한 이후이다.
1975년에 약산(葯山) 문진채(文晉采)[1906∼1990]가 쓴 「인수문고 소식(仁壽文庫小識)」에 의하면 "광거당과 수백당[수봉 정사]에 만여 권의 전적과 여러 종류의 고서화가 소장되어 있었다. 세상의 어지러움으로 중간에 제대로 살피고 돌보지 못한 때도 있었고, 특히 6·25 전쟁 때에는 다소의 손실이 있었는데 서화의 피해가 더욱 심했다. 그래서 의논하여 수봉 정사 구내에 잘 보이는 곳을 택해 집을 짓고 두 곳의 책을 옮겨 함께 수장하고 '인수문고'라 이름하였다."고 하였다.
인수문고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1982년이다. 국고 보조를 받아서 좁았던 존안각을 헐고, 수봉 정사 옆에 있던 밭 991.73㎡에 서고 건물을 새로 지어 인수문고의 서책을 보관하였다. 또한 인수문고 서책을 열람하고, 그 내용을 담론하기 위한 건물로 거경 서사(居敬書舍)를 함께 신축하였다. 이후 1993년에는 20세기에 간행된 서적만을 보관하기 위해 중곡 서고(中谷書庫) 한 동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내 제일의 문중 문고, 2만 권당 인수문고!]
2007년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 동산 문화재 조사에서 인수문고 소장 자료 가운데 고서는 모두 1,342종 8,556책, 고문서는 6,814건, 책판은 5종 558판, 유물은 신주함, 문갑, 벼루, 도자기 등으로 27점이, 현판도 27점이 확인되었다. 이외에 중곡 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현대서는 3,961종 5,590책으로 조사되었다. 이후 8년이 흐른 2015년에는 더욱 많은 서적들이 수집되었을 것이다.
2007년 조사 당시에는 주요 소장 고서로 『주자어류 대전(朱子語類大全)』,『주자 행장(朱子行狀)』,『고려사(高麗史)』,『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육율분운(陸律分韻)』,『당송팔자백(唐宋八子百)』,『예기집설대전선(禮記集說大全選)』,『사마온공경진계고록(司馬溫公經進稽古錄)』,『서애응고악부(西涯擬古樂府)』,『풍요속찬(風謠續選)』,『경국대전(經國大典)』 등과 같이 내사본(內賜本), 귀중본, 왕실 서적 등이 완질로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전적의 판본은 목판본과 석인본, 신연활자본, 필사본 등으로 다양하였는데, 이들 전적이 제작된 시기는 17∼18세기 간행본도 다수 있지만 19세기에 간행된 서적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례로 임진왜란 이전 간행된 전적은 『현수제승법수(賢首諸乘法數)』[1427년 간행], 『엄주산인사부고(弇州山人四部稿)』[1577년], 『고금만성통보(古今萬姓統譜)』[1579년], 『전국책(戰國策)』[1581년], 『중간천가주두시전집(重刊千家註杜詩全集)』[1581년], 『산당사고(山堂肆考)』[1595년] 등 모두 6종이 확인되었다. 고서의 주제별로 분류해 봤을 때 경부(經部)에는 당시 교과서로 많이 사용되던 사서류가 가장 많으며, 자전·옥편 등이 포함되어 있다. 사부(史部)는 전체 장서의 약 1/4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중국의 정사류가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또 한국사 부문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기본 사료가 거의 망라되어 있다. 자부(子部)는 유가류 전적이 가장 많고, 병가(兵家), 농가(農家), 의가류(醫家類) 외에도 천문(天文), 산력(算曆) 등의 서적도 고루 갖추고 있다. 특히 의서는 20종이 되는데, 일제 강점기 당시 보건 위생이 강조되고 서양 의학의 확산 속에서 우리 한의학의 보존과 민간 의료 확산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집부(集部)는 전체 전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대개 우리나라의 문집이며 일부 중국의 것도 있다.
인수문고 소장 책판은 558판으로 5종 서책의 판목이다. 1926년 간행된 문박(文樸)이 편찬한 『경정공 사적 척록(敬靖公事蹟摭錄)』 판목 46장, 1930년 문박이 편찬한 『충숙공 실기(忠肅公實紀)』 판목 22장, 1924년에는 오광운(吳光運)[1689~1745]의 문집 『약산 만고(藥山漫稿)』를 후손 오병서(吳炳序)가 편찬·간행하였는데, 현재 54장이 있다. 이상정(李象靖)의 「결송장」에 손자인 이병원(李秉遠)이 학설을 보충한 『결송장보(決訟場補)』는 1926년 문원만(文元萬)이 간행하여 현재 121장이 있다. 박치복(朴致馥)[1824~1894]의 문집인 『만성 선생 문집(晩醒先生文集)』은 1925년 광거당에서 판각하여 간행한 것으로, 현재 315장의 판목이 남아 있다. 이외에도 이곳에서는 1930년까지 『이대산 실기(李大山實記)』, 『이기휘편(理氣彙編)』, 『제양록(制養錄)』 등 적지 않은 문헌을 간행하였다.
이처럼 인수문고에서는 서적의 보관과 열람뿐만 아니라 출판 활동을 통해 내부적으로 남평 문씨 가문의 자긍심을 키우고, 외부적으로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 한편, 쇠퇴하는 유교 문화를 보존·확산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수문고의 가치, 철저히 계획된 장서 수집과 보존·관리]
인수문고는 여타의 서원·향교·개인의 문고에 비하여 방대한 서적을 자랑하고, 우리나라 도서관 역사상 그 유래가 드문 문중 문고로서 가치가 있다. 그리고 민간 소유의 장서로서는 질과 양적인 면에서도 으뜸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남평 문씨가는 1910년 광거당을 세우고 서책을 수집하여 후손들의 교육의 장소를 마련하였다. 문자와 글이 없어지면 나라와 민족이 망한다는 절실한 인식 하에 글을 숭상하고 후진을 기르기 위한 방안이었으며, 일본에 대한 저항 의지의 발로였다. 또한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고 망국의 아픔을 토로하는 시국 토론장이 되기도 했다. 광거당 내에는 심재 조긍섭이 지은 기문(記文)과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1853~1936]가 쓴 당호(堂號) 현판, 그리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창강 김택영과 근세 중국의 명사 장건(張謇) 등의 편액과 주련이 걸려 있다.
문고에는 경사자집(經史子集) 전반과 중국의 정사류를 비롯하여 다량의 청판본 그리고 농, 의, 병 및 천문, 산력 기타 필사본 등 여러 분야에 걸쳐 1,000종이 넘는 서책이 수장되어 있다. 이들 서책은 옛날부터 전래된 것도 다소 있지만 서적의 특징과 내용으로 보아서 1910년을 전후하여 의도적이며 조직적으로 수집한 것이다. 실제 남평 문씨가는 서책을 수집하는 데에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였다. 전문가의 추천을 받아 책을 선정한 다음 국내의 서점 등에서 구입하거나, 중국 서적의 경우 상해에서 오는 배편에 실어 목포로 보내도록 했다. 배가 도착했다는 기별을 받으면 목포로 사람을 보내 대구까지 소달구지 등을 이용하여 운송하였다. 광거당의 책은 이처럼 많은 자금과 인력 및 시간, 정성 등이 들어간 결과물이었다. 이것은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자기의 주체성을 지키겠다는 자존심, 그리고 그 시대 명사들과의 다양한 인맥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렇게 수집된 서책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겪으면서 후손들을 교육하고 민족 의식을 심어 주기 위해 설립된 문중 문고이기에 전적의 분야가 광범위하면서도 특징적인 면을 갖추고 있다. 먼저 집부가 전체 전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 문집과 전기류(傳記類)가 많이 소장되어 있기 때문인데, 문중 문고의 특징적인 면모이다. 이외에도 서책을 수집할 당시 역사서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 까닭은 망국을 경험한 후손들에게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심어 주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짐작된다.
한편 수집된 장서를 잘 보관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광거당 전수 규약」을 만들어 서적의 관리를 엄격히 하고, 서적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인수문고의 서책은 낙질본 없이 모두가 완질본인 점이 큰 특징이다. 그리고 오동나무 상자를 만들어 분류한 책들을 모두 그 속에 보관하고, 상자의 측면에 책의 이름과 권수를 적어서 책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하고, 좀이나 먼지를 방지하여 책을 오랫동안 보존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