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빈면 묘리 묘골마을 순천박씨 집성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1008
한자 河濱面 竗里 妙- 順天朴氏 集姓村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재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태고정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638
도곡재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638지도보기
묘골마을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성격 집성촌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순천 박씨 집성촌.

[개설]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묘골마을은 순천박씨(順天朴氏) 집성촌이다. 이 마을은 조선단종(端宗) 때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1417~1456]의 후손들이 560년간 대를 이어 살아온 영남의 대표적인 양반 마을이다. 묘골마을은 한 때 70여 호나 되는 큰 집성촌이었으나 지금은 후손들이 도시와 인근 촌락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형성 및 변천]

박팽년의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으로 1417년(태종 17)에 태어나 1456년(세조 2) 사육신들과 모의하여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멸문(滅門)의 화를 입게 되었다. 이때 화를 당한 사람은 박팽년 자신과 이조 판서이던 아버지 박중림, 4형제인 박인년, 박기년, 박대년, 박연년과 박팽년의 아들 박헌, 박순, 박분 등 모두 삼대 9명이었다.

그런데 박팽년의 혈통이 이어진 것은 일가가 멸족될 당시, 박팽년의 둘째 아들 박순(朴珣)의 아내 이씨 부인이 임신 중이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뱃속에 든 아이까지도 아들일 경우 죽이라고 엄명하였다. 이씨 부인은 친정인 묘골에 내려와 살다가 아이를 낳으니 아들이었다. 유일한 혈손을 보존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마침 데리고 있던 노비가 딸을 낳자 서로 바꾸어 그 이름을 박씨 성을 가진 노비라는 뜻으로 박비(朴婢)라고 지었다. 아들을 노비로 둔갑시켜 혈통을 보존한 것이다. 박비가 장성한 후인 조선성종(成宗) 때, 아버지와 동서지간이던 이극균이 경상 감사로 내려와 울면서 자수를 권유하자 임금을 찾아가 박팽년의 자손임을 이실직고하였다. 성종은 크게 기뻐하면서 특사령을 내리는 동시에 이름도 박일산(朴壹珊)으로 고쳐 주었다. 이리하여 은둔의 세월은 막을 내리고 묘골이 충절(忠節)의 본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현황]

묘골에는 묘골 박씨들의 전통을 자랑하는 육신사(六臣祠)와 달성 태고정(達城太古亭), 도곡재(陶谷齋), 달성 삼가헌(達城三可獻) 등의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육신사는 사육신을 배향하는 사당이다. 보물 제554호로 지정된 달성 태고정은 조선 1479년(성종 10)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99칸 집을 짓고 살 때 세운 정자 건물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1614년(광해군 6)에 다시 지은 것이다. 도곡재(陶谷齋)는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1778년(정조2) 대사성(大司成)[성균관의 최고 관직, 정삼품의 벼슬]이던 서정공 박문현의 살림집으로 건립한 것이다. 1800년대에 와서 도곡 박종우(朴宗佑)의 재실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 불렀다. 도곡은 조선인조(仁祖) 때의 사람으로 문장이 뛰어났으며 절의와 덕행을 모두 갖추어 동방의 일인자라 칭송받았지만,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전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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