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14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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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溪集 |
이칭/별칭 | 『용계 문집(龍溪文集)』,『용계 선생 문집(龍溪先生文集)』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창근 |
[정의]
조선 후기 활동한 문신 서변의 시문집.
[저자]
서변(徐忭)[1605~1656]의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자경(子慶), 호는 용계(龍溪)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서응기(徐應基)이고, 할아버지는 서함(徐涵)이며, 아버지는 서사건(徐思建)이다. 1620년(광해군 12)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3년(인조 11)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서학 교수가 되었다. 그뒤 청나라에 대한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경성 통판(鏡城通判)에 승진하였다. 1652년(효종 3) 예조 정랑으로 있으면서, 귀인 조씨(貴人趙氏)의 옥사에 관계되어 유배된 그녀의 아들 이징(李澂)과 이숙(李潚)을 용서하고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아들을 유배에서 풀 것을 주장하였다.
1656년 천안 군수로 재직하던 중, 승지 유도삼(柳道三)이 왕의 동생 인평 대군(麟坪大君)에게 실수로 신하라고 자칭하였던 사실을 빌미로 인평 대군의 처남 오정일(吳挺一)을 비롯하여 허적(許積)·원두표(元斗杓)·한전(韓戩)·윤세교(尹世喬) 등이 모역한다고 고발하였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심문을 받던 중 장살(杖殺)되었다. 뒤에 신원(伸寃)[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예조 참의에 추증되고, 대구 옥계 서원(玉溪書院)에 향사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1894년(고종 31) 후손 서수열(徐壽烈) 등이 서변의 시문을 모아서 『용계집(龍溪集)』을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강태중(姜泰重)의 서문, 권말에 김대곤(金大坤)의 발문이 실려 있다. 고려 대학교 도서관과 연세 대학교 학술 정보원 등에 소장되어 있다. 『용계 문집(龍溪文集)』, 『용계 선생 문집(龍溪先生文集)』이라고도 불린다.
[형태/서지]
목판본 4권 2책으로 되어 있다. 판식은 사주 쌍변(四周雙邊)으로 상하 내향 이엽 화문 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이다. 크기는 세로 33.0㎝, 가로 21.7㎝, 반곽은 세로 20.2㎝, 가로 15.9㎝이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18자이다.
[구성/내용]
권1은 시(詩), 권2는 전(箋)·책(策)·소(疎)·명(銘), 권3은 연보(年譜), 권4는 부록(附錄)으로 되어 있다. 책(策) 중 「왕약왈약서맹호운운(王若曰約誓盟好云云)」에서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은 우리가 강인하지 못해서 자초한 것이니, 자강(自彊)하려면 덕을 닦고, 장수를 선발하고, 인화(人和)를 얻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의의와 평가]
『용계집』은 조선 후기 당시의 문인이 쓴 시문집으로 「왕약왈약서맹호운운」, 「상진팔로아록급청위차전소(上陳八路衙祿及請爲車戰疏)」에서 보이듯 임진왜란 이후 중앙 정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당대의 문인들이 어떠한 현실 인식을 가졌는지를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