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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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The History of the Gapy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선사/석기,선사/청동기,선사/철기,고대/초기 국가 시대,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주혁 |
[정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기도 가평군의 역사.
[선사]
가평군에는 선사 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먼저 구석기 시대의 경우, 청평면 고성리에서 찍개와 긁개 등 10여 점의 뗀석기가 채집된 바 있는데, 북한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석영제 찍개류의 전형적인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이어지는 신석기 시대의 경우도 역시 북한강 유역 신석기 문화 생활권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인다. 가평읍 마장리, 북면 이곡리, 청평면 삼회리 등지에서 빗살무늬 토기 편이 수습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경우는 전기 문화인 구멍무늬 토기가 주를 이루며, 후기 문화인 덧띠 토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가평읍 달전리, 가평읍 마장리, 북면 이곡리, 청평면 대성리 등에서 유적이 확인되었다. 철기 시대의 경우, 마장리와 달전리의 유적이 한국 철기 문화사에 있어 중요성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특히 2003년에 발굴된 달전리 움무덤은 남한 최초로 발굴된 고조선계 움무덤 유적으로 고고학계에 보고되었다.
[고대]
삼국 시대의 가평 지역은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삼국 간의 치열한 경쟁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가평 지역은 처음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5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고구려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고구려는 가평 지역을 차지하고 근평군(斤平郡)과 심천현(深川縣)을 설치하였다. 이후 6세기 중반이 되면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가평 지역을 빼앗아 통치하기 시작하는데, 행정적으로는 춘천 지역의 지휘를 받았다. 삼국 통일 이후에는 가평 지역 군현의 이름을 가평군(嘉平郡)과 준수현(浚水縣)으로 변경하였으며, 각각 태수, 현령 등이 파견되었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 가평 지역은 수도인 개성에서 북한강 상류로 진출하는 길목에 해당하여 행정적·군사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맡았다. 행정적으로는 춘주(春州)[지금의 강원도 춘천시]의 속군이었는데, 춘주는 교주도(交州道)의 행정 중심지였다. 한편,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가평군의 대표적인 산으로 화악산과 청평산을 언급하였다. 여기서 화악산은 지금도 가평군에 속하지만, 청평산은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에 있는 오봉산을 의미한다. 고려 시대 가평군의 지역적 범위가 현재의 가평군 북면과 인접하고 있는 춘천시 사북면 일부와 북산면 일대까지 미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1348년(충목왕 4)에는 공민왕 대에 왕사와 국사에 책봉된 승려 보우가 가평 소설암에 머물렀고, 1382년(우왕 8)에 입적할 때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 머물렀다. 1383년(우왕 9) 9월에는 왜구가 강릉-회양-김화-평강-홍천-화천-양구-춘천-가평 등 북한강 유역을 따라 강원도 내륙 지방으로 침략하였는데, 10월에 가평에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청평산으로 퇴각하였다.
[조선 시대]
조선이 건국될 무렵 가평은 춘천에 소속되어 있었고, 따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지역에 해당하여 토착 향리가 지역을 통솔하고 있었다. 하지만 건국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396년(태조 5)에 가평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고, 조종현[지금의 조종면과 상면]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1398년(태조 7)에는 가평 최초의 교육 기관이라 할 수 있는 가평향교가 건립되었다. 1413년(태종 13)이 되면 가평이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이속되었으며, 지방관으로 현감이 파견되었다.
중종이 즉위한 후 1507년(중종 2)에 국왕의 태가 봉인된 곳이라 하여,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어 가평군(加平郡)이 되었다. 1661년(현종 2)에는 조광조(趙光祖)와 김식(金湜)을 추모하기 위해 지금의 설악면 선촌리에 미원서원이 건립되었다. 1697년(숙종 23)에는 역모를 꾀하다 적발된 이영창(李榮昌)이 가평 출신이라는 이유로 현으로 강등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10년 뒤인 1707년(숙종 33)에 다시 군으로 승격하였다.
[근대]
가평 지역은 근대에 접어들며 행정 구역 변동이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1888년(고종 25) 강원도 춘성부(春城府)에 속하였다가, 1894년(고종 31)에 다시 경기도로 환속되면서 포천군(抱川郡)에 속하게 되었다. 1895년 5월 26일에는 전국 행정 구역이 23부 337군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가평군은 한성부에 편제되었다가 7월 19일에 다시 포천군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1896년 8월 4일 전국 지방 제도 개혁에 따라 기존의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로 바뀌게 되는데, 이때 가평군으로 독립하여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1895년에 일어난 을미사변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는데, 가평에서도 이충응(李忠應)과 신재희(申在熹)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이 일어났다. 가평 지역 의병들은 이소응(李昭應)을 중심으로 한 춘천의 의병과도 결합하였으며, 가평 보납산 등에서 관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어 1905년에는 을사조약에 항거한 조병세(趙秉世)의 순국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9년 3월 15일과 16일에는 북면에서 대규모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1938년 1월 1일에는 가평군 군내면이 가평면으로 개칭되었고, 1942년에는 양평군에 소속되어 있던 설악면이 가평군으로 편입되었다. 또 1940년대 청평수력발전소 개설 과정에서 남면의 달전리·이화리·산유리·복장리·금대리가 가평면으로, 고성리·호명리가 외서면으로 편입되면서 남면이 폐지되었다.
[현대]
해방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가평군에서도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1951년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영국연방 제27 여단이 북면 일대에서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에 맞서 치열하게 싸워 승리하였다. 가평전투의 승리로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한편,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강을 경계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가평지구에서의 전투를 기리기 위해 1958년 3월 15일에 가평지구전투전적비, 1967년 9월 30일에 영연방참전기념비가 가평읍 읍내리에 건립되었다. 한편, 6·25전쟁 당시 민간 차원에서 의혈대와 결사대가 조직되어 반공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현대에 이루어진 행정 구역 개편 조치를 보면, 1963년에 외서면 입석리·내방리·외방리가 양주군 수동면[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에는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해 가평면이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양평군 서종면 서문리가 가평군 설악면으로, 서종면 삼회리가 가평군 외서면으로 편입되었다. 2004년 12월 1일에는 외서면이 청평면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2015년 12월 16일에는 하면이 조종면으로 변경되었다. 2016년 11월에는 조종면 하판리가 조종면 운악리로 변경되었다.